좋은 시

목향 - 김추인

heystar 2013. 11. 13. 12:14

                목향木香

                 —생명의 환

  

                                 김추인

 

 

   악기장이 새끼 목수는

   다듬어지고 있던 벽오동 옆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무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이입되는 생멸의 시간

   숲의 큰 작은 불안세계를 덮으며

   벼락 맞은 오동은 명금을 약속했다

 

   이윽고 가얏고가 제 울음을 짚어내는데 천년 나이테를 비워낸 나무의 울림통이 소리를 머금었다 토하는 가얏고가 톱날 같은 대팻날 같은 캄캄하게 헤집고 가던 소리의 기억을 마른 목질 아래 눌러두었던 산조 가얏고가 온몸을 흔드는 떨림으로 제 노래를 풀어내는데

  시김새가 기러기발을 줄줄이 꺾어 넘고 남지나해를 건너 두견 울음을 필사하던 손끝이 또 산맥 하나 더 넘어가는 동안 악공의 오음은 내내 진자줏빛이었다

 

  죽사리치는 견딤 없이 나무의 상처 속에서 어찌 용천하는 해율(海律)을 풀어낼 수 있으리

 

  한 아침이 지나고 또

  어느 먼 곳에서 오동 밑동 깊숙이 도끼날이 드는지

  전생의 숲에서 흐릿한 기억처럼 오는

  생목(生木) 향(香)

  나무의 이야기는 끊일 듯 끊일 듯

  소년에게서 어린 목수를 꺼내고 있었다

  

  - 월간 『현대문학』2013년 6월호 발표

 

1947년 경상남도 함양 출생.

-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 1986년 《현대시학》등단.

- 시집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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