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창가에 앉아 1분 - 이기철

heystar 2013. 7. 29. 12:04

            창가에 앉아 1분

 

 

                                        이 기 철

 

 

 

붉은 자전거의 뒤쪽은 아름답고 앞쪽은 쓸쓸하다고 쓰려면

창 앞으로 바짝 다가가야 한다

안과 밖을 다 보여주는 것은 창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창을 만든 사람보다 창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눈이 창의 안이거나 바깥이었을거라고 생각하며

입을 옆으로 벌려 창을 길게 발음해 본다

창은 깨지는 소리여서 창이라는 발음은 처음부터 아름답지는 않으나

그가 처음 창이라 부른 뒤부터 창은 아름다워졌다

시 속에 들어가 보면 시는 아름답지 않은 말의 집합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시라고 불러서 비로소 아름다워졌다

내가 창가에 앉는 것은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를 잊기 위해서다

나는 더 많은 돌에 걸려 넘어져 봐야 돌의 생명을 안다고 말하려다가

시에 더 많이 걸려 넘어져 봐야 시의 생명을 안다고 말하려고 창가에 앉는다

이 시간 나처럼 누군가가 창가에 앉아 있다면

그도 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잊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창이 아름답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해서 그것을 창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창은 몸 안에 위도 폐도 간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은 흐린 것까지 잘 보여주므로 흐린 마음들은 창을 믿지 않는다

  안과 밖, 앞과 뒤가 없는 저것을 공중에 달아놓고 창, 하고 부른 사람

그는 아마도 시를 버리기가 가장 좋은 곳이 창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창이 받아주지 않아 그 말을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입이 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창이 대신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은 창으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르면 더 고요하고 만지면 더 차가워지는 창을

처음 창이라 부른 사람, 그의 둥근 입술을 보고 싶다

 

 

- 『현대시학2012년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 영남대 문리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시집 『열하를 향하여』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유리의 나날』

- 저서 『손수건에 싼 편지』『시학』『작가연구의 실천』등

- 1993년  '김수영문학상' 1998년 '시와 문학상'  수상.

            - 1976년 <자유시> 동인. 대구시인협회 회장 역임.

- 1995년 뉴욕주립대 방문교수 역임. 영남대 교수.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아래서 - 임동윤  (0) 2013.09.16
기상도 - 김기림  (0) 2013.07.29
나무 금강 로켓 - 이영광  (0) 2013.07.05
서울 - 서효인  (0) 2013.07.05
모란의 연(緣) - 류시화  (0) 2013.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