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무인칭의 죽음 - 최승호

heystar 2013. 6. 20. 11:30

     무인칭의 죽음

 

                             최 승 호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一)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변기통에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출처] 사이버문학광장 - 문장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 서울대학교와 同 대학원 졸업.

- 1977년 《현대시학》 등단.

- 시집; 『대설주의보』, 『고슴도치의 마을』, 『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 『여백』, 『그로테스크』, 『모래인간』 등

- 산문집; 『황금털 사자』, 『달마의 침묵』, 『물렁물렁한 책』 등.

- 그림책; 『누가 웃었니?』, 『이상한 집』.

- 수상; 1982년 '오늘의 작가상', 1985년 '김수영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2000년 '대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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