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詩 - 이 화 은
다만 벽을 보고 술을 마셔야 했던 그 집
건물과 건물 사이
돌아가거나 비킬 틈이 없는 틈 사이
복잡한 감정의 봉합선처럼
한 땀 한 땀
꿰매 듯 순서대로 자리를 채워 앉아
면벽하고, 면벽하고 마시는 술은 늘 비장했다
저 벽
말없이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놈 앞에서
술꾼은 쉽게 분노한다
분노는 음주의 본질이기도 하니
침묵의 수위를 견디지 못해 술잔을
바람벽의 엄숙한 면상에 던지는 자도 있지만
이만한 술친구도 없다고
실금만한 틈이라도 있으면
감쪽같이 숨어 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밤이면 또 감쪽같이 스며든다
날이 밝기 전에 아물지 않은 이 도시의 수술자국이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
마침내 저 봉합선이 깨끗이 지워지고
완벽한 실종을 꿈꾸는 자들이
제발 승리하기를! 밤마다
벽은 위대한 장사꾼이었다
-계간『시평』, 2011년 여름호에서
이화은 - 경북 경산 진량 출생.
- 인천교육대학교 및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 1991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 시집『이 시대의 이별 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 현재 <포엠토피아>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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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노트
이화은의 <틈>은 들어서면서부터 비장하다. 도심의 공룡 같은 건물과 건물 사이 ‘돌아가거나 비킬 틈이 없는’ 세상의 비좁은 틈바구니에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 줄을 내 건 팍팍한 삶의 현장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곳은 배부른 이들이 버린 소외된 공간이지만 삶이 고달픈 이들에게는 구원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면벽하고, 면벽하고 마시는…’에서 처럼 ‘면벽’을 목메어 되뇌는 화자에게서 풍기는 고독감과 출구 없는 막막함에 독자는 충분히 먹먹해지고 만다.
‘침묵의 수위를 견디지 못해’ 바람벽에 술잔을 내던지는 비애 역시 묵묵부답, 성자처럼 담담한 벽을 친구 삼아 독작해 본 사람이라면 쉽사리 공감할 수 있으리라.
‘틈’이란 주제어가 풍기는 뉘앙스도 만만찮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서 흔히 읽혀지는 빈부의 간극은 물론이요, 사람과 사람사이의 균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나아가서는 생과 사의 거리 등등 시인은 한 마디 명사를 앞세워 수많은 틈을 제시하는 중의법을 노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고수다.
뿐만 아니라 견고한 벽과 그 벽이 제 몸에 지닌 흉터인 틈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면서 둘인 절묘한 아이러니를 표상한다 해도 좋겠다.
반면 ‘감쪽같이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와 ‘완벽한 실종을 꿈꾸는 자들이’ 같은 행들은 이음동의어가 아닐까 싶게 의미구조가 일치했다.
또한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 와 ‘저 봉합선이 깨끗이 지워지고’ 라는 구절 역시 쓸데없는 중언부언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강조법이라 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시란 함축된 언어로 명징한 그림을 그렸을 때 감동이 배가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에서 작가의 친절한 설명은 사절이다.
굳이 딴지를 걸자면 또 있다,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라는 구절은 '흉터 없이 말끔히 낫기를'이라고 고쳐써야한다. 물론 시에는 도치법이 있다. 그러나 효과없는 도치법은 안 쓰느니만 못하다.
‘복잡한 감정의 봉합선’ 이란 구절도 거슬리긴 마찬가지다. ‘복잡한’ 이란 형용사는 -어지러운, 뒤숭숭한, 어수선한, 붐비는- 등의 발음도 부드러운 우리말이 얼마든지 있다. 운문과 산문을 구분하는 척도가 언어사용에도 있다면 시인은 언어 앞에서 겸허히 숙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감정의 봉합선’ 역시 날 것 그대로다. 꼭 서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보다 적어도 시라면 적절한 시어가 적확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해야 한다, 작가의 어휘력이 딸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요즈음 시는 요설이나 잡설, 비문조차도 평론가들의 혀끝에서 새로운 문학사조로 화려하게 탈바꿈하는 판국이니 무지한 나를 감동시키는 시인이 아직 남아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자위한다.
사족 같지만 사실 이렇게 잠시 현실을 피해 숨어 들 틈새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 같은 소시민은 거대한 벽 앞에 쉬이 주저앉을지도 모를 일, 밤마다 감히 승리를 꿈꾸는 술꾼들로 틈새 주점은 오늘도 붐빌 것이다.
‘위대한 장사꾼’에게 축복 있으라!
- 2011년 09월 박해성의 제멋대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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