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箱의 <막 달아나기>
단언컨대, 李箱의 시에는 <초현실주의적> 외양이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초현실적>인 내용은 없다. 그가 괴이한 방식으로 시를 쓰고, 숫자와 도표와 그림들을 언술 속에 끌어들이고, 가능한 한 난삽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용심하게 된 데는 일본을 거쳐 들어온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적지 않았겠지만, 사위가 적으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건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식민지의 한 지식인이 합리적 추론의 끈을 불신하고, 계산의 보장이 없는 미지의 세계 속으로 깊이 잠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습관이 이치를 대신하는 곳에서 거의 최초로 근대의 합리적 사고체계를 교육 받은 세대가 합리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일정한 개념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시 합리적 사고를 열심히 연습하는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李箱에게서는 아무리 난삽하게 보이는 시라고 하더라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투시적 직감보다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 분석이 더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李箱은 자기 언술의 힘이 최대한으로 확장되기를 원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될 수밖에 없는 이 식민지인은 그나마 확실한 것인 말의 논리와 계산에 <절망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烏瞰圖』의 「詩第十二號」이다.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러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조각하늘저편에戰爭이끝나고平和가왔다는宣傳이다.한 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不潔한戰爭이始作된다.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때는또한번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1)
李箱에게서 초현실주의의 특징들, "立體派나 未來派, DADA의 단면"을 보려 하는 한 연구자가 이 시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작품의 제재는 언뜻 보아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빨래 또는 세탁이다. 그기고 그 시간, 장소 곧 부대는 청명한 날의 빨래터로 추정된다. 이 작품도 그런 제재와 무대 배경 위에서 약간의 환각, 또는 난시현상을 일으키면서 허두가 시작되었다.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러떨어진다." 여기서 '空中으로'는 정상적인 진술형태라면 '空中에서'래야 온당하게 쓰여진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李箱은 의도적으로 '-에서' 대신 '-으로'를 쓴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는 보기로 든 이 작품의 첫 文章에 내포되어 있다. 본래 빨래는 우리가 일상 쓰는 의류, 또는 주거용 물품들이어서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李箱은 이 작룸에서 그것을 '하늘'에서 온 것인 양 전이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이것은 어떻든 환각, 또는 의식상의 난시상태에서 빚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 '空中'에서의 정상적 격조사 사용보다는 '-으로'라는 어색한 말씨가 쓰여진 셈이다.2)
이 시에 <환각>이나 <의식상의 난시현상> 같은 것은 없다. <그 여자는 한 송이 꽃이다>라는 표현을 난시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시인이 다소간이나마 진정으로 환각상태에 있었다면 '빨래조각'과 '흰 비들기'라는 두 말을 함께 쓰지 않을 것이다. 풍차를 거인이라고 여긴 동키호테는 '풍차'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 무더기 빨래감이 날라 떨어진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나서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라고 다시 덧붙일 때, 시인은 <이제 내가 빨래조각을 비들기에 비유하여 말할 테니 어디 한 번 들어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으로'와 '-에서'라는 두 격조사에 관한 이 연구자의 추론도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빨래감이 떨어지는 바로 그 자리에 시인이 서 있다면 '-에서'가 온당한 격조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격조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정황을 설정한다면, 시인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서 빨래터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빨래하는 사람이 빨래감을 집어 던졌으며, 그래서 빨래감은 공중'으로' 날랐다가 (아마도 물 속에) 떨어졌다. 李箱은 물론 이편 저편을 가르고 있지만, 적어도 이 빨래감에 대해 말하는 동안은 근경과 원경의 표현이 아니라, 던지는 쪽과 떨어지는 쪽을 단순히 분별해서 나타내는 말일 뿐이다. 이 이편 저편이 다른 두 세계를 나타낼 만큼의 거리감을 갖는 것은 빨래감이 비둘기로 비유되고, 그래서 작은 빨래터가 하늘의 규모를 얻고나서의 일이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들은 매우 사소한 것들이지만, 李箱의 시어가 지녔을 말의 논리와 진실을 불신하는 데서 비롯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이 사소한 것들이 모여 결국은 '立體派나 DADA' 같은 오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간과하기 어렵다.
빨래감과 비들기의 비유에는 말할 것도 없이 비들기가 평화의 표상이라는 생각이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李箱은 이 표상의 상투성에 동의하기보다는 그것을 비웃는다. 때 묻은 옷이 물 속에 떨어질 때, 그것이 "戰爭이 끝나고 平和가 왔다는 宣傳"인 것은, 저 상투적 표현의 차원에서, 떨어지는 빨래감이 날라드는 비들기를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지만, 실제의 차원에서는 빨래감이 그것을 때 묻게 했던 생활전선에 잠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그 순결성을 다시 회복할 기회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빨래감에게 이 휴식과 평화의 시간은 또한 지독한 전쟁의 시간이다. 빨래감은 짓밟히고 방망이로 얻어맞아야 한다. 게다가 자신이 비들기로 비유될 때,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로 비유되는 물 속에 자신의 '불결한' 때를 풀어 놓아야 한다.
거룩하게 평화를 표상하는 비둘기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둘기떼가 한 하늘에서 다른 하늘로 날아 갈 때 그 모습은 어떤 것의 상징일만큼 자유로움과 휴식을 느끼게 하지만 그것들 역시 고단한 삶의 한 전쟁터에서 다른 전쟁터로 날아가고 있을 뿐이다. 전쟁 하나가 끝난 하늘 저편에 다른 전쟁이 벌써 준비되고 있다. 삶의 고단한 때 자국이 잠시 하늘에 풀린다.
이 시는 폐질환을 앓는 한 소모성 환자가 그 생명의 끝까지 놓아 버릴 수 없었던 자기 회복의 열망과 비둘기들이 하늘을 바꾸면서 잠시 얻는 휴식의 시상이 겹쳐 특별한 서정성을 확보한다.
초현실에 관해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李箱의 시 한 편을 더 읽자. 다음은 그의 시 「꽃나무」이다.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 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爲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3)
벌판에 꽃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뿐 다른 꽃나무가 없는 것은 현실의 꽃나무들로부터 추상된 관념의 꽃나무 하나를 시인이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꽃나무는 "熱心으로 꽃을 피워 가지고" 서 있는데, 이 열성적인 꽃피우기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 곧 꽃나무의 관념에 대해 '熱心으로 생각하기'와 같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꽃나무는 모든 꽃나무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 되려고 열심히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이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또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관념의 꽃나무에까지는 근접할 수 없다. 현실의 추상으로부터 관념이 발생할 수는 있어도 관념이 현실로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막달아났소"라고 시인은 말하는데, 이 모호한 말은 마지막 문장의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라는 구절을 염두에 둔다면, 열심히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일로부터 도피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관념 속으로의 도피가 마치 현실에서의 실천인 것처럼 가장하였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시 다른 말로 바꾼다면 도피가 그에게는 하나의 실천이었고 꽃피우기의 가치를 지녔다는 뜻이 된다.
李箱의 도피는 보기에 따라서 매우 기괴한 양태를 지닌다. 그는 관념과 이론을 극단화하여 그것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도피했다. 그는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한 글에서 "彈丸이 一圓도[원기둥]를 疾走했다"는 문장을 제시하고 "彈丸이 一直線으로 疾走했다"는 표현의 오류을 수정한 말이라고 쓴다. 또 같은 글에서 "角雪糖"이라는 말 대신 "正六雪糖"이라는 표현을 시도하고, "瀑筒의 海綿質 塡充[채우기]"이라는 말에 "瀑布의 文學的 解說"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4).
이는 모두 한 사물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극단화한 표현들이다. 극단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확실히 세상을 잘 보는 것이 아니다. 현미경과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모든 물건과 공기 속에서 우굴거리는 세균을 볼 것이다. 세균으로 가득찬 세상이란 과학적인 현실일 수는 있어도 생활 현실은 아니다. 그것은 균형이 제거된 시각이 붙잡아 내는 과도한 현실이다.
李箱은 자주 그 극단의 수학적 논리로 어떤 실험실적 상황에서만 가능한 과도한 현실을 마련한다. 이 과도한 현실의 실험으로 생활 자체가 실험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현실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인 것은 현실의 '이상스런 흉내'이고 생활 현실에서 막 달아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얻어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실험실적 상황에서일 망정 생활 현실의 고통이 과도한 현실 속으로 희석되는 그 과정에서 이따금 <지금 이 시간>의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시선이 얻어지고, 거기서 독특하고 아름다운 시어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李箱에게서 초현실의 모습을 두르고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인 바로 이 과도한 현실일 것이다.
황현산 (고려대 교수)
[출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공 - 이경림 교수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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