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이 화 은
다만 벽을 보고 술을 마셔야 했던 그 집
건물과 건물 사이
돌아가거나 비킬 틈이 없는 틈 사이
복잡한 감정의 봉합선처럼
한 땀 한 땀
꿰매 듯 순서대로 자리를 채워 앉아
면벽하고, 면벽하고 마시는 술은 늘 비장했다
저 벽
말없이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놈 앞에서
술꾼은 쉽게 분노한다
분노는 음주의 본질이기도 하니
침묵의 수위를 견디지 못해 술잔을
바람벽의 엄숙한 면상에 던지는 자도 있지만
이만한 술친구도 없다고
실금만한 틈이라도 있으면
감쪽같이 숨어 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밤이면 또 감쪽같이 스며든다
날이 밝기 전에 아물지 않은 이 도시의 수술자국이
말끔히 낫기를 흉터 없이
마침내 저 봉합선이 깨끗이 지워지고
완벽한 실종을 꿈꾸는 자들이
제발 승리하기를! 밤마다
벽은 위대한 장사꾼이었다
-계간『시평』, 2011년 여름호에서
경북 경산 진량에서 출생.
인천교육대학교 및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1991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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