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스냅 - 임영조
봄소풍 나온
할머니들 대여섯이
오순도순 화투를 친다
손주 같은 햇살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잔디밭에서
노년을 말리듯 화투를 친다
이미 색 바랜 光과 남은 소망을
한 장씩 탁탁 던지고 나면
왠지 허전하고 저린 손이여
못내 아쉽고 덧없는 세월이여
송학이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매화가 피고 지고
객혈하듯 벚꽃이 흥건한 방석
때 아닌 국화, 철 이른 모란 난초
덩달아 피고 지는 화무십일홍
하느님도 구경하기 심심하신지
싸리순 몇끗 짐짓 내미는 봄날
이런 날은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순한 기쁨이 좋다
익명의 스냅이 좋다
-출처; 임영조 시집 『귀로 웃는 집』 1997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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