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리뷰

반경환의 [명시감상]

heystar 2019. 10. 9. 16:06



             앓다       - 박해성



   삭신이 욱신 작신, 마냥 아우성입니다


   나의 몸은 창세기부터 통증을 훌륭히 키워내는 대자대비 숙주입니다.

죄 없는 질병들을 어린양처럼 부양하느라 고달플 때도 있지만요 그들이

있어 사실 나는 심심할 틈이 없지요. 요즘 들어 양들은 가끔 늑대가 되기

도 하지만 그들을 함부로 때려잡을 수는 없답니다. 늑대를 잡으려면 내

안의 비밀동굴을 파헤쳐야 하는데요, 나는 발해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

므로 헤프게 열리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죠. 항복 대신 마지못해 협상

을 선택하고 알약을 삼킵니다. 이렇게 삼킨 것들을 다 모으면 아마 내 몸무

게쯤 되지 않을까 갸웃갸웃, 알약들이 꿀렁거리는 가죽부대가 걸어갑니다.

있는 듯 없는 듯이 발해는 감감하고 자칫 낡은 부대자루가 터질까 내심

조마조마한데

   오늘은 날이 흐려서 아무 생각 않을래요.*

   * 『조주록』하권에서 차용.


                                                                            [출처]  박해성 시집 『판타지아, 발해』 2018, 지혜 


   우리 시인들은 대부분이 시적인 것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시적인 것은 따로 없고, 오직 시적인 것은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살고 있으며, 나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면 될 터인데,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것을 쓰지 못한다. 책을 읽고, 반성하고, 성찰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글은 공허한 관념과 상투적인 허위의식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살고 있으며, 나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가장 절실한 주제이면서도 전생애를 다 바쳐서 탐구해도 그 해답을 내놓기가 어려운 문제이다. 이 주제와 이 화두를 추구하는 과정에는 생살을 후벼 파는 듯한 아픔과 고통이 따르고, 이 아픔과 이 고통의 내용을 쓸 때, 그의 시는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정직함과 성실함에도 고통이 따르고, 그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도 고통이 따르고, 나를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모든 행위들에도 고통이 따른다. 벼와 고추와 사과나무와 감나무와 참새와 노루와 까치와 그 모든 것들의 삶 자체가 고통이듯이, 이 고통을 쓸 때만이 시는 아름다워지고, 그 생명력을 얻게 된다. 우리 시인들의 시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그가 사유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으며, 자기가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통은 만병통치약이자 성장촉진제이다. 모든 위대함의 기원은 고통이며, 고통받지 않는 자는 시인의 월계관을 쓸 수가 없다.


   박해성 시인의 [앓다]는 현실주의의 승리이자 상징주의의 승리이고, 상징주의의 승리이자 낭만주의의 승리이다. 왜냐하면 ‘앓다’는 현실이고, 발해는 이상낙원이며, 이 발해를 찾아가는 과정은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창세기부터----태어날 때부터----통증을 키워내는 대자대비의 숙주이고, 죄없는 질병들을 어린양처럼 부양하는 어머니이다. 나는 통증을 키워내고 어린양을 부양하느라, 날이면 날마다 삭신이 욱신 작신 마냥 쑤셔대지만, 그러나 나는 나의 통증과 질병들을 키워내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 나는 창세기부터 통증이 있어 즐겁고, 죄없는 질병들을 키워내느라고 즐거운 것이다. 산다는 것은 통증이고, 질병이며, 이 통증과 질병이 있기 때문에 ‘발해’라는 이상낙원을 찾아갈 수가 있다. 통증과 질병은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이 통증과 질병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나의 삶이 끝장이 났다는 것을 뜻한다. 통증과 질병들은 가끔가다가 나를 잡아먹을 듯한 늑대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 늑대들을 함부로 때려잡을 수가 없다. 통증과 질병들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날뛰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크고 작은 사건들을 수없이 일으키며 성장해나가는 것과도 같다. 우리의 아이들이 크고 작은 사건들을 수없이 일으킬 때마다 그 사건들을 묵묵히 다 수습해내며, 우리의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야 하듯이, 통증과 질병들은 발해로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통증과 질병, 즉, 늑대는 야성이며, 건강함이며, 모든 위대함의 징후이다. 어서 빨리 늑대를 잡아야 한다는 수많은 원성들을 물리치고, 나는 그 대신 비책묘계로서 약을 먹는다. 이때의 약은 이 통증과 질병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라고 할 수가 있고, “이렇게 삼킨 것들을 다 모으면 아마 내 몸무게쯤 되지 않을까 갸웃갸웃, 알약들이 꿀렁거리는 가죽부대가 걸어갑니다”라는 시구는 그 통증과 질병들을 다스리기 위한 고통의 총체를 뜻하고, “있는 듯 없는 듯이 발해는 감감하고 자칫 낡은 부대자루가 터질까 내심 조마조마”하다는 것은 ‘발해’로 가기 위한 그 어렵고 힘든 노정路程을 말한다.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어렵고 힘들고, 비천하고 천박한 것은 쉽고 간단하다. 어렵고 힘든 것은 고통을 수반하고, 쉽고 간단한 것은 쾌락을 가져다가 준다. 고통은 나쁜 것이고, 쾌락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고통 끝에는 쾌락이 따르고, 쾌락 끝에는 고통이 따른다. 발해, 발해----, 옛 고구려의 후손들이 대륙에다 세운 영원한 제국----, 박해성 시인의 이 ‘영원한 제국의 꿈’이 그를 이처럼 앓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질병과 생명은 하나이듯이, 이 질병을 잃으면 나의 생명도 죽은 것이다. 꿈과 생명이 하나이듯이, ‘발해’라는 ‘영원한 제국의 꿈’을 포기하는 것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꿈은 아픔이고, 질병이며, 꿈은 나의 생명과도 같다. 아픔과 질병은 모든 천재적인 힘의 어머니이며, 이 천재적인 힘이 우리 한국인들의 기상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제국인 ‘발해’를 건설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통증과 질병을 통해서 ‘영원한 제국인 발해’를 찾아간다는 것, 이 통증과 질병들이 늑대처럼 날뛰어도 이 통증과 질병들을 함부로 때려잡을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이 박해성 시인의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정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고, 새로운 것은 가장 아름답고 참신한 시구들을 낳게 된다. 박해성 시인의 [앓다]는 그만큼 새롭고 참신하며, 충격적인데, 왜냐하면 모든 가치들의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픔도 좋은 것이고, 질병도 좋은 것이고, 야성의 늑대도 좋은 것이다.

   진정한 시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말하고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르게 생각하고, 이 다름을 새로운 문장 속에 새로운 언어로 써넣을 수 있는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킨 독창적인 명명자이며, 언어의 기원을 소유한 창조자이며, 영원한 월계관을 쓴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픔과 질병과 수많은 늑대들을 데리고 그들과 함께 살며, 수없이 죽었다가 그때마다 되풀이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박해성 시인은 아픔의 어머니이자 질병의 어머니이고, 이 야성의 늑대들을 거느리고 ‘발해’라는 영원한 제국을 건설해낸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luepandora/3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