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지 『애지』의 기획시집으로 선정되어 여름부터 준비했던 나의 세번째 시집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다음 글은 출판사에서 보내준 내 시집에 대한 광고성? 안내문이다, 좀 팔려줘야 할텐데... *^^*
이 책에 대하여
둥 둥둥 북소리가 천궁 활짝 엽니다.
아사달 아사녀가 비손하던 신라의 달이 발해 주작대로에 엷은 깁을 펼칩니다. 달떴다, 어둠을 밀어내는 누군가 한마디에 나는 즉시 애마를 몰고 갈기 휘날리며 키 작은 풀꽃들이 꿈꾸는 초원을 지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말 타고 누볐다는 대륙의 바람 속을 적토마처럼 내달려 오래전 연암이 건넌 열하의 푸른 물에 부르튼 발을 씻으리니
참아도 터지는 울음, 방목해도 좋으리라
一「판타지아, 발해-발해시편1」, 전문
발해를 직접 다룬 작품이다. 초장의 묘사를 보면, 발해란 하나의 원만구족한 세계이자 우주임을 알 수 있다. 사설조로 이어진 중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애마를 몰고 갈기 휘날리며” 달릴 수 있는 호방한 대륙적 풍모와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대대로 생명을 이어가던 어떤 신화적이고 근원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발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또한 그 곳은 ‘달’과 ‘초원’, ‘대륙의 바람’과 ‘열하’라는 강물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원형적 상징들이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발해는 “신라”라든가 “연암” 등의 기표가 표상해주듯이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하나의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이나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떤 곳에도 없는 이상향과 같은 곳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몸을 지칭하면서 “나는 발해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앓다」)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 민족의 유전자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무형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두금 첼로보다 그 울림 더 절절해 피아니시모 흐느낌이 발해까지 다 적시는, 심금”(「심금(心琴)」)처럼,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극적으로 등장하는 “참아도 터지는 울음”은 이처럼 가치 있는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린 상실감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일 것이며, 그러한 세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상일 것이다. ‘발해’의 필요성과 의미를 다음 작품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며칠째 체한 듯이 명치가 뻐근합니다.
산책을 나섰지요. 상경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작대로는 이 도시의 등뼈이자 동맥입니다. 대낮 천천히 도심을 거닐다 한 사내를 만났어요. 어느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했는지 맨발로 절뚝이는 무장해제 패잔병, 봉두난발에 겹겹이 걸친 찌든 넝마조각이 그날 그 갑옷인 듯 참 버거워 보였습니다. 발해 변방 사투리인지 중얼중얼 히죽히죽 알 수 없는 혼잣말로 도깨비 허깨비처럼 흐늘거리는 젊은 사내 텅텅 비워 빈 눈동자 깊이를 잴 수 없는 먹먹한 그 어둠을 어쩌나, 나는 흘깃 훔쳐보고 말았는데요. 주변을 압도하는 장엄한 지린내 속에 시커먼 손가락으로 불어터진 국수발을 입속으로 쓸어 담는 아, 그도 한때는 천리마 잔등에서 활 쏘며 신출귀몰 이 산하를 주름잡던 용맹스러운 전사였을 터
여기는 어디입니까? 패배주의가 꽃피는
―「체하다-발해시편4」, 전문
상경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작대로에 한 사내가 등장하는데, 그는 오늘날 광화문 대로를 배회하는 무기력한 현대인의 모습, 특히 길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의 모습은 부상당한 패잔병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봉두난발”이라든가 “넝마조각” 등의 어휘들이 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대변해준다. 또한 “중얼중얼 히죽히죽 알 수 없는 혼자말”이라든가 “도끼비 허깨비”등의 어휘들, 그리고 “텅텅 비워 빈 눈동자” 등의 묘사들은 그의 영혼이 건강하지도 그윽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주변을 압도하는 장엄한 지린내 속에 시커먼 손가락으로 불어터진 국수발을 입속으로 쓸어 담는” 모습은 그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과 품격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한때는 천리마 잔등에서 활 쏘며 신출귀몰 이 산하를 주름잡던 용맹스러운 전사였을 터”인 그 사내가 이처럼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발해’라는 유토피아, 어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생명력의 원천인 발해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인용한 『판타지아, 발해-발해시편1」의 종장에서 “참아도 터지는 울음, 방목해도 좋으리라”라고 오열한 까닭이나 이 시에서 “며칠째 체한 듯이 명치가 뻐근합니다.”라고 답답해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바로 이러한 발해의 상실에서 오는 상실감을 대변해주고 있다. 발해의 상실은 육체의 피폐와 영혼의 고갈, 그리고 품격의 손상과 생명력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종장에서 “여기는 어디입니까? 패배주의가 꽃피는”이라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패배주의로 진단하는 모습은 민족적 차원의 위축된 분단 현실을 상기하면서 왜소하고 나약해진 현대인들의 삶의 자세와 심성에 대해 환기해준다. 이러한 현실 진단은 곧 시인에게 왜 ‘발해’가 필요한지, 왜 시인이 그토록 ‘발해’라는 상징적 세계에 집착하면서 복원하려고 하는지를 역설해준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존재론적 현실에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야생적 생명력과 호방한 품격을 잃어버리고 나약한 일상을 버텨가는 왜소한 현대인에 눈을 돌리면, “눈도 코도 귀도 없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의심스러운 발해”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언제나 “밀서 같은 침묵 속에 움트는 신생 왕조”(「행운목」)」인 발해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심금은 악기입니다. 당신도 연주할 수 있는// 가야금이나 바이올린보다 훨씬 오래 된 악기, 악보가 필요 없는, 인류 보편적인, 배우거나 가르칠 이유가 없는, 마두금 첼로보다 그 울림 더 절절해 피아니시모 흐느낌이 발해까지 다 적시는, 심금을 뜯다가 줄이 끊어져 막幕 내린 사람을 압니다. 이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에도 있을지니// 눈 감고 현絃을 튕기면 꽃몸살이 도진다는,
----[심금心琴] 전문
----박해성 시집, {판타지아, 발해},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10,000원
저자 소개
박해성
박해성 시인은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부문)로 등단했으며, 2012년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수상, 2015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16년 올해의 좋은 시조집 선정, 2016년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된 바가 있다. 시집으로는『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루머처럼, 유머처럼』등이 있으며, 현재는 자유시와 시조를 쓰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박해성의 세 번째 시조집인 『판타지아 발해』는 시집 전체가 ‘발해’라는 하나의 상징의 숲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시조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집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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