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랫만에 리뷰를 올린다.
오늘 온라인을 뒤져 그동안 내가 놓쳤던 리뷰를 찾아 읽으며 왠지 시조에게 죄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동안 작품발표도 격조했다. 몇몇 문학지의 시조 원고청탁은 정중히 사양 했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라고 해야 하나???
이제 쟝르에 연연하지 않고 내 마음이 시키는 쪽을 바라볼 것이다.
이우걸의 현대시조 산책 ㅡ 「지압판을 밟는 동안」
지압판을 밟는 동안
박해성
다 늙은 냉장고가 앞 동에서 끌려 나온다
온 식구 먹여 살리느라 마디마디 골병든
그이는 이제 퇴출이다, 치워야 할 쓰레기다
두 남자가 달려들어 트럭 위에 그를 묶는다
누구라도 퇴화가 용서되지 않는 세상
요양원? 아니 아니지... 고물 집하장인가?
남의 일인 양 흘깃흘깃 빨간 양산이 지나가고
목이 긴 접시꽃이 체머리를 흔드는데
현상과 현장 사이로 여우비가 스쳐간다
멸종을 예감했는가, 백악기의 공룡처럼
유언도 없는 마지막을 그저 지켜보는 이
지구를 꾹꾹 밟는다 최선인 듯, 달관인 듯,
― 《시산맥》 2017년 가을호
박해성 시인의 좋은 작품들은 대체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 스토리가 평상적인 것인데도 그는 그 평상적인 스토리를 극화시킬 줄 안다. 그래서 울컥하는 격정을 가져다준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설사 누가 아무리 세심하게 관찰해도 그의 그런 시적 능력을 다 말할 수 없겠지만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오래 된 냉장고를 치우는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며 은근히 초고속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건드린다. 평생 식구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던 늙은 가족의 최후의 모습을 이 작품은 겹쳐 읽게 한다. 그 단순한 얘기를 극화시키기 위해 ‘골병든 뼈마디’ ‘달려들어 묶는’ ‘두 남자’ ‘빨간 양산’ ‘여우비’ 등이 효과적으로 가세하고 있다. 이런 표현 능력이 그의 타고난 서사 능력이다. 예사롭지 않은 입심이다. 여기에서 제목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사자(死者)를 묻는 혈족들의 냉정함이거나 내 일이 아니라고 방관하는 사람들의 운동하는 모습을 유추하게 하여 더욱 이 풍경을 비감하게 하고 있다. 시의 일차 대상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럽게 중의적 의미를 갖게 하는 그의 어사 동원 솜씨는 언제나 놀랍고 든든하다.
이우걸ㅣ
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맹인』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 『주민등록증』 외 다수, 비평집 『현대시조의 쟁점』 『우수의 지평』 『젊은 시조문학 개성읽기』가 있음.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외 다수 수상. 현재 시 전문지 《서정과현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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