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빅뱅과 토마토우주론 - 권혁웅, 3

heystar 2019. 8. 14. 13:03

 -애지 2019년 가을호 <애지의 초대석- 이경림 작품론>에서 이어지는 세번째 이야기.


토마토우주론-1.hwp




   6. 어긋남

 

   현실과 꿈의 이 잇닿음은 서로 다른 것들의 동시성同時性이기도 하다. 우리 우주에서 시간은 독립변수도 절대지수도 아니다. 시간은 광속光速이라는 절대지수에 묶인 종속변수이자 상대지수다. 광속으로 날아가는 입자에게는 질량이 0이고 시간이 정지해 있다. 정지한 모든 사물에서 일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그 사물이 속도를 얻을수록 점점 느려지다가 광속에 이르면 멈춘다. 무게도 마찬가지다. 이 우주에서 관찰되는 사물들의 무수한 속도는, 그 사물들 각자에게 서로 다른 시간을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시간대의 사람/사물이 만나면 이렇게 된다.

 

   나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아님 당신의 시계가 고장났습니까. 나의 시계는 지금 세신데 왜 당신 은 자꾸 열시라고 합니까. 당신은 말합니다. 늦었어, 그만 불 끄고 자지. 그러면 나는 대답하죠, 아이 당신두…… 한낮인데 자다니요? 그러면 또 당신은 심드렁하게 말하겠지요, 장난치지 말고 잠이 나 자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야말로 장난치지 말아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잖아요. 픽 업해서 미술학원에 데려다 줘야지요. 아니 한 밤중에 학원이라니? 그럼 정말 당신이 아직 세시에 있 단 말이오? 나도 당신이 벌써 열시에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벌써 열시에 도착했다면 그 사이 일곱시간은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이죠?

   내가 일곱시간 동안 무얼 했냐구? 가만있자…… 세시에 사무실에서 연말결산을 끝내고 네시에는 p 상사 김부장을 만나고 여섯시에 퇴근을 하고 잠수교를 건너고 혼자 저녁을…… , 여보 피곤해 죽겠다 제발 잠이나 자자. 무슨 소리예요? 난 네시에 여고동창 모임이 있어요. 그리고 열시에는 다 시 학원에 있는 아이를 데려와야 하잖아요? 무슨 소리야, 그럼 당신은 벌써 내일 세시에 도착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무려 열일곱 시간을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이오? 하긴 뭘 해요? 맨날 다람 쥐 쳇바퀴 돌기지.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당신은 회사에 가고 나는 청소를 했죠. 당신 집을 닦았 죠. 당신 세탁기를 돌렸죠. 위이이잉 세탁기 속에 지구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뜨개질을 했죠. 세탁기 속에서 처얼썩 철썩, 파도소리가 들렸죠. 파도에 아랫도리가 다 젖는 줄도 모르고

- 고장 난 시계 사이로 내려가는 계단부분

 

    시는 불통不通을 보여주는 우화로 읽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간대를 정확히 지키며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내가 낮이라면 당신은 밤이어서, 둘 사이의 시차時差는 시차視差로 전환된다. 결국 서로에게 다른 시간은 다른 의미들이 된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주의 시간을 채워간다. 그러다가 서로 다른 시간은 이렇게 만난다.

 

   축하합니다 아침을 먹을 수 있는 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설거지할 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저놈의 바퀴벌레를 쳐죽일 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배탈이 나 데굴데굴 구를 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콩나물 사러가다 넘어져 면상이 피투성이 될 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유리, 부분

 

   복권은 확률의 게임이 아니라 우연의 게임이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지극히 낮아서, 그야말로 우연으로 점철 된 운명이 아니고서는 행운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람/사물들로 이 우주가 그득 차 있다면, 그래서 각자의 시간이 무작위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만남/사건이라면,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일상도 우연의 연속이 아닌가?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우연, 먹 나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 우연, 바퀴벌레를 잡는 우연, 배탈이 나는 우연, 그리고 낙상을 겪는 우연. 그렇다면 저 복권가게 유리 뒤에 숨어/ 주먹만 한 구멍으로 불쑥,/ 검버섯투성이의 손등만 내미는/ 복권장수 늙은이야말로 이 토마토 우주를 관할하는 늙은 신이라 해야겠다.

 

   7. 전쟁/ 축제

 

   이경림의 시를 읽는 일은, 큰 나와 작은 나 사이의 교환(여기서 반성, 무의식, 자의식 등의 테마가 나온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호환(여기서 초월과 현세, 존재론과 현존이 문제시된다), 기원의 은닉과 영향력(여기서 이미지, 기억, 현전이라는 주제가 제시된다). 비유들(여기서 우주론, 적합성, 물활론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호들(여기서 언어학, 의미론, 기표의 우선성 등이 토의된다). 몽유록(여기서 현살과 환상이 갈마든다). 시대착오(여기서 우연과 필연, 운명과 자유의지가 대두된다) ……를 목격하는 일이다. 토마토로 대표되는 이 우주는 우리 우주이기도 하다. 이 우주는 이토록 복잡하고 활기차고 생생하다. 여기서는 날마다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 전쟁은 축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옆집 토마토들 아직 전쟁 중 무한정적의 토마토 던지는 중

   무한정적의 토마토 휙휙 날아다니는 중 뭉개지는 중

   뭉개진 토마토 다시 뭉개며 무한정적의 거대한 토마토 속에서

   부활하는 중

   - 토마토 혹은 지금부분

 

   우리는 토마토들이다. 토마토우주의 거주민들이다. 우리는 전쟁 중이다. 윗집 아랫집 토마토들은 층간소음 때문에 다투고, 옆집 토마토들은 부부싸움으로 바쁘다.터지고 깨진 토마토들로 인해 우주에 유혈이 낭자하다. 그러나 토마토는 그렇게 으깨져야 케쳡으로, 주스로 부활한다. 그렇게 서로 던지고 맞는 과정을 우리는 토마토 축제La Tomatina라 부른다. 그 축제/ 전쟁의 우주적 장면을 소개한 책이 방금 우리 앞에 도착했다. [끝]

 

 

 

- 글쓴이 권혁웅은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다.

- 충북충주태생 - 고려대학교 졸업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학위 수여 1988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 1997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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