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19년 가을호 <애지의 초대석- 이경림 작품론>에서 이어지는 두번째 이야기.
3. 비유
하나의 토마토는 무수한 토마토이기도 하며, 각각의 토마토는 하나의 큰 토마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큰 토마토와 작은 토마토들의 포함관계가 있으며, 작은 토마토들끼리의 비교관계가 있다. 시학에서는 이런 사물들 사이의 연대를 비유라고 부른다.
옆집 남편 b는 택시 운전사, 나는 그의 하루를 비유적으로 분류해보기를 좋아한다. 일테면 그의 하루는 대개의 인간군처럼 밤과 낮 독립 된 두 절로 나눌 수 없다. 그는 임의로 밤과 낮을 소환한 다. 그의 한낮은 눈에 불이 출출 흐르는 그의 호랑이, 신신택시 운전대에 앉아 수십 개의 눈들이 레 이저를 뿜어대는 빌딩 숲을 누비며 호시탐탐 승객을 찾을 때이다. 그때 나는 그를 불타는 눈깔이라 분류한다. 불볕 쏟아지는 택시 정류장에 서서 오가는 행인을 하릴없이 눈으로 좇을 때 그는 늪에 빠 진 시계다. 어쩌다 뻥 뚫린 6차선 도로에서 백미러로 낯이 반반한 아가씨의 둔덕 같은 가슴을 눈으 로 집적거릴 때 그는 섹스하고 싶은 나나니벌, 노름방에서 일당을 몽땅 털리고 나와 골목 어귀 느 티나무에 등을 대고 뿌옇게 담배 연기나 날릴 때 그는 대낮 아파트 벚나무 가지에 날아든 수리부엉 이, 그 일로 마누라에게 쫓겨나 피시방에서 자판이 부서져라 두드려댈 때 그는 와르르 무너지는 굴 뚝이다. 그러나 이 모든 비유는 적합한가?
- 「비유적 분류」부분
“옆집 남편 b”(그의 이름이 이미‘비유’다) 무수히 다른 대상들로 변환된다. 비유는 존재변환의 문턱이다. 이 문턱을 넘나들며 존재들은 이전移轉된다. 그는 정말로 “불타는 눈깔”이, “늪에 빠진 시계”가, “섹스하고 싶은 나나니벌”이, “대낮 아파트 벚나무에 날아든 수리부엉이”가, “와르르 무너지는 굴뚝”이 되는 것이다. 비유는 나란히 두고[比] 말하기[喩]다. 곧 그가 여러 대상들로 비유될 때 , 그는 하나의 큰 토마토(어쨌든지간에 그의 이름은 b이다)이자 무수한 토마토들인 것이다. 이 비유가 “적합한가?”를 묻는 일은, 이 존재변환이 사불들이 있는 곳을 제대로 지정했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적합성이란 하나의 우주가 성립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건이다. 적합성이 사라지면 우주cosmos는 혼돈chaos으로 변하고 만다.
4. 기호들
비유는 사물들을 기호로 바꾼다. 기호들 사이의 교환관계에 의해서 비유가 성립한다. 이제 사물들을 대신해서 기호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토마토tomato는 시작과 끝이, 앞뒤가 똑같은 기호다. 저 좌우로 벌린 팔(“토, to”)은 하나를 다른 하나와 바꿔주는 천칭의 두 팔과도 같다. 우주에 든 각각의 사물을 등가교환하는 데에 이만한 기호가 없을 것이다. 세계는 기호들의 역량에 따라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록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
한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분
L……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 하시고
J? 하시면
O…… 하시고
쫘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
그 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 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
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는 계셨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 하시고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 「지렁이들」전문
지렁이들이 온몸으로 글자를 써나가고 있다. 물론 그 뜻은 다 알려지지 않아서, 지렁이들의 대화는 엿듣는 인간에게 “동문서답”이다. 그러나 필생畢生의 힘으로 쓰는 필생筆生에 어찌 뜻이 없을 수 없겠는가? 저 글자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진정한 비의를, 나아가 저 말을 주고 받았던 “당신”과 “나”를, 그 말들을 발설한 진정한 “이목구비”와 “주둥이”와 “똥구멍”을, 그 말들의 발설 된 횟수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세계를 거대한 도서관에 비유했다. 기호들의 이합집산이 세계를 드러내고(세계는 기호들로 단순히 표상되는 게 아니다. 세계는 기호들에 의해서 출현한다.) 세계의 운영원리를 노출하고(문법이란 기호들의 순서와 결합원리만이 아니다. 세계가 바로 그 문법에 의해서 구선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다. (기호는 그 기호를 쓴 자와 기호들이 가 닿지 못 하는 영역까지 표시한다.) 마지막 지적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할 게 있다.
바닷가 끝없이 널린 돌멩이마다
O, L, T, B, E, R 이 경 폐 병 추……
아무 뜻도 없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 「만약 네가 나에게 칼 한 자루를 준다면」부분
가정법의 형식으로 받은 저 “칼”을 (기호를 새기는데 쓰므로) 실은 펜이라고, 기호화의 역량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아직 뜻을 갖지 못한 기호들을 적어 가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 말들이 무의미한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의미화하지 못함’마저도 의미화한 메커니즘 속에 들어있다. 저 말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의미의 세계로 부상할 것이다. 이를테면 세계는 낡았으나(“O, L, (+D)”) 더 나아질지도 모르고 (“B, E, T(+T), E, R”), 나는 이 “병”들고 “추”하고 버려진(“폐”)세계에 개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 (+림)”). 그러니까 기호는 기호화하는 역량과 더불어 기호화할 수 없음(무능!)까지도 제 자신의 역량으로 내장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도 소리은유는 번번히 쓰이고 있는데, 이 역시 기표들이 끌고 들어오는 기의들이라는 점에서 기호의 역량이다. 대상만이 아니라 주체도 그렇다.
그때 Na는 무우수 나무 아래 모로 누워 na의 마지막을 가두고 있었다
na의 필생畢生 위로 헤아릴 수도 없는 na들이 꽃잎으로 떨어져 내렸다.
겨울인지 여름인지 늦가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na는 늦가을이었다 여름이었다 이른 봄이었다
- 「Na, na」부분
우주와 외연을 맞댄 큰 토마토가 있고 “터럭”만큼 작은 낱낱의 토마토가 있듯이, “나”에게도 큰 나(大我, Na)와 작은 나(小我, na)가 있다. 전자는 우주나무 (‘無憂樹’) 아래서 우주를 명상하는 ‘나’이고 후자는 매 순간 생멸을 거듭하는 존재자로서의 ‘나’다. 게다가 작은 ‘나’들을 살육하러오는 “진압군”인 “성난 NA”(초자아는 그처럼 나를 꾸짖고 금지하는 내 안의 ‘나 아닌 나’[非我] 다)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기호들의 변환 ―대문자 Na는 큰 나이고, 소문자 na는 작은 나다―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필생筆生이 “na”의 소관이라면, 후자na는 시 쓰는 나와 그 시 속의 나들로 분화되며, 전자Na는 그 모든 분신들을 소환하거나 분신들이 귀환하는 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5. 몽유록
기호와 기호화된 것 혹은 기호화하는 것 사이가 구별되지 않으므로, 글 위의 세계와 실제 세계는 경계 없이 섞인다. 이것의 문학적 표현이 몽유록이다. 몽유록에는 꿈이 본문本文이고 이상理想이지만, 이경림 시인의 시에서 초점은 꿈에 놓여 있지 않다. 꿈은 오히려 생시(현실)과 구별되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잠이 너무 쬐그맣습니까? 침대만 점점 거대합니까? 침대에 맞추려고 몸이 막 달아납니까? 날아갑니까? 당신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초침 소리만 천둥칩니까? 당신이 너무 커서 잠이 보이지 않는 밤이 계속됩니까? (잠을 푹 뒤집어써야 잠이 온다 했는데)
그러려면 우선 달아나는 침대를 붙잡아 창틀에 매야 합니다 날아가는 당신을 잡아 침대에 묶어야 합니다 초침 소리에 맞춰 부풀어오르는 몸에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바람 빠지는 소리에 휩쓸려 무 한천공 날아가더라도 죽기 살기 혼 줄을 놓아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죠 그때 침대는 벌써 아르헨티 나나 우루과이 어디쯤을 지나는 중일지도 모르니까요 거기까지 당신의 방 안이 계속되는지 알 수 없다구요? 지금 안이라 하셨습니까?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입니까? 털실 보푸라기만한 그 잠이 과연 안에 있을까요? 밖에 있을까요?
쯧쯧, 잠을 미처 찾지도 못했는데 꿈이 먼저 왔습니까? 난데없이 전쟁이 터지고 산이 무너집니까? 옆집 남자가 복면을 하고 쑥 들어옵니까? 처음 보는 사람인데 자꾸 식구라도 우깁니까? 그런 사람 이 헛간 거미줄에 디룽디룽 매달려 있습니까? 왜 거기들 있냐고 물어도 기척 없습니까? 자세히 보 니 죽은 거미들입니까? 우주의 창들이 부슬부슬 삭아 내립니까? 슬그머니 사라집니까? 칠흑이 눈부 십니까? 침대가 문득 멈췄습니까? 바람 빠지는 소리가 천둥칩니까?
성공입니다 드디어 단신 잠으로 들었군요
이녁이 밝았다 해도 믿지 마세요
잠이 밝았다 해도 믿지 마세요
잠 속입니다
아, 예에,
아침은 잡수셔도 됩니다
- 「불립不立 혹은 불면不眠」전문
시를 읽다보면 어디까지고 생시이고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불면의 밤을 구성하는 모든 전전반측은 몽유의 모험이요, 떠오르는 모든 잡념은 꿈의 내용이며, 기상을 알리는 알람은 잇닿아 있는 꿈이다. 꿈과 현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느샌가 자리를 바꾼다. 꿈이 현실이며 현실이 꿈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들었는데, 그 잠이 다시 꿈의 현실, 꿈 속의 생시가 되고 말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몽유록이 아니라 몽유병의 하루를 보여준다. 잠든 채 아침을 먹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묻는다. 우리는 잠을 못 자는 것일까, 잠에서 못 깨는 것일까?
봄? 나무마다 중구난방 쥐뿔같은 것이 터져나오는
알 수 없는 거리距離
헤아릴 수 없는 캄캄한 하룻밤
그리하여, 그 셀 수 없는 하룻밤과 하룻밤이 딥키스에 들 때
나는 곰곰 생각하지
혈압약을 먹고 아침을 먹을까
아침을 먹고 혈압약을 먹을까
- 「혈압약을 먹고 아침을 먹을까 아침을 먹고 혈압약을 먹을까」마지막 부분
이경림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저 무수한 동물성의 환상들을 떠받치는 것은 이처럼 몸에 대한 사실적인 기술이다. 이것이 시인의 시를 현실과 꿈의 난장亂場으로, 그러나 정교하게 구축된 난중일기로 만든다.
- 내일도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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