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와불 -인은주
한잠을 자고난 후 연해진 몸의 빛깔
꿈인 양 구도인 양 한 생이 잠잠한데
아사삭 공양마저도 봄비처럼 푸르다
햇빛을 먹고 자라 하늘로만 향하는지
허물을 벗자마자 새로 나온 머리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섶을 찾아 오른다
평생에 딱 한번만 오줌을 누는 누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우고
누운 채 펼치는 설법 길고도 청명하다
◆장원 약력
- 1960년생 충남 당진 출생. 가정주부. 지난해부터 경기도 수원의 시조 쓰는 동아리 ‘시랑’에서 시조 공부.
차상
불타는 책 -김재길
콘센트만 뽑혀도 사라져 버리는 이데아 그 앞에 21세기마저 광신도가 되었다 고독한 호모사피엔스도 책을 던져버렸다.
문자가 사라진 뒤 노래도 사라졌다 눈 먼 길을 더듬어 예언이 찾아올 때 그 누가 손을 내밀어 등불을 밝혀주리.
누구든 그 안에 절대자가 있다 믿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는 진화 속에 영혼은 블랙홀에 갇혀 두 눈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모든 기도 0과 1로 찬송되고 디지털로 클릭하는 불멸의 페이지 그 뒤에 나무의 책이 스스로 불에 탄다.
차하
장경각에서 각수(刻手)를 만나다 -유선철
소맷자락 스치면서 한 번쯤 보았을까
박제된 시간의 벽 슬그머니 허물고 온
손마디 굵은 사내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속울음 쟁여놓고 파랗게 벼린 날끝
한 자씩 경을 새긴 팔만의 목판에는
먹물이 안으로 스며
살빛 더욱 또렷한데
마구리 감아쥐면 움찔하는 바람의 눈
티끌도 앉지 못할 형형한 활자 위로
들린다, 발자국 소리가
달빛 타고 내려온
이 달의 심사평
누에와 와불이라, 상상력 참 싱싱하다
이달 장원은 인은주씨의 ‘와불(臥佛)’이다. 누에를 와불로 형상화했다. 시 전편이 경건하고 성스럽다. 누에는 일생 네 번의 잠을 자고 네 번의 허물을 벗는다. ‘한잠’씩 자고 날 때마다 ‘몸의 빛깔’이 ‘연해진’다. 그러다 ‘섶을 찾아 오’르고 ‘평생에 딱 한 번만 오줌을’ 눈 후 고치를 만든다. 누에의 한살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누에의 생을 설명하는 글에 치우칠 수 있었으나 ‘누운 채 펼치는 설법/ 길고도 청명하다’는 셋째 수 종장이 그 힘을 잘 보여준다. 첫째, 둘째 수를 ‘봄비처럼 푸’르고 투명한 이미지로 변환시켰다. 시조는 종장의 힘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차하는 유선철씨의 ‘장경각에서 각수(刻手)를 만나다’다.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는 추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구양순필체의 글씨는 예술이다. 그 글씨를 쓴 사람도 그렇지만 그것을 팔만 개가 넘는 경판에 새긴 각수들의 솜씨는 실로 대단하다. 화자는 장경각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각수를 만난다. 발상은 신선하지만 주제나 의미의 확장이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 겨룬 이는 최세희·김석이씨다. 우연히 두 사람 다 제목이 ‘솟대’다. 한층 깊고 새로워진 ‘솟대’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오승철·강현덕(집필 강현덕)
와불 -인은주
한잠을 자고난 후 연해진 몸의 빛깔
꿈인 양 구도인 양 한 생이 잠잠한데
아사삭 공양마저도 봄비처럼 푸르다
햇빛을 먹고 자라 하늘로만 향하는지
허물을 벗자마자 새로 나온 머리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섶을 찾아 오른다
평생에 딱 한번만 오줌을 누는 누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비우고
누운 채 펼치는 설법 길고도 청명하다
- 1960년생 충남 당진 출생. 가정주부. 지난해부터 경기도 수원의 시조 쓰는 동아리 ‘시랑’에서 시조 공부.
차상
불타는 책 -김재길
콘센트만 뽑혀도 사라져 버리는 이데아 그 앞에 21세기마저 광신도가 되었다 고독한 호모사피엔스도 책을 던져버렸다.
문자가 사라진 뒤 노래도 사라졌다 눈 먼 길을 더듬어 예언이 찾아올 때 그 누가 손을 내밀어 등불을 밝혀주리.
누구든 그 안에 절대자가 있다 믿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는 진화 속에 영혼은 블랙홀에 갇혀 두 눈을 잃어버렸다.
세상의 모든 기도 0과 1로 찬송되고 디지털로 클릭하는 불멸의 페이지 그 뒤에 나무의 책이 스스로 불에 탄다.
차하
장경각에서 각수(刻手)를 만나다 -유선철
소맷자락 스치면서 한 번쯤 보았을까
박제된 시간의 벽 슬그머니 허물고 온
손마디 굵은 사내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속울음 쟁여놓고 파랗게 벼린 날끝
한 자씩 경을 새긴 팔만의 목판에는
먹물이 안으로 스며
살빛 더욱 또렷한데
마구리 감아쥐면 움찔하는 바람의 눈
티끌도 앉지 못할 형형한 활자 위로
들린다, 발자국 소리가
달빛 타고 내려온
이 달의 심사평
누에와 와불이라, 상상력 참 싱싱하다
이달 장원은 인은주씨의 ‘와불(臥佛)’이다. 누에를 와불로 형상화했다. 시 전편이 경건하고 성스럽다. 누에는 일생 네 번의 잠을 자고 네 번의 허물을 벗는다. ‘한잠’씩 자고 날 때마다 ‘몸의 빛깔’이 ‘연해진’다. 그러다 ‘섶을 찾아 오’르고 ‘평생에 딱 한 번만 오줌을’ 눈 후 고치를 만든다. 누에의 한살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누에의 생을 설명하는 글에 치우칠 수 있었으나 ‘누운 채 펼치는 설법/ 길고도 청명하다’는 셋째 수 종장이 그 힘을 잘 보여준다. 첫째, 둘째 수를 ‘봄비처럼 푸’르고 투명한 이미지로 변환시켰다. 시조는 종장의 힘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차상는 김재길씨의 ‘불타는 책’이다. 컴퓨터에게 밀려난 종이책이 ‘스스로 불에’ 타고 있다. ‘0과 1’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상은 ‘콘센트만 뽑혀도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도 그것을 이데아로 생각해 모든 세상이 그의 ‘광신도가 되었’고, 이제는 책이, 문자가 사라져 사람들의 ‘영혼은 블랙홀’에 갇혔다고 탄식한다. 맹목적인 컴퓨터의 사용이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밀도 있는 전개와 거침없는 호흡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절제미·균형미가 다소 흐트러진 느낌이다. 과잉 감정과 관념은 배제돼야 한다.
차하는 유선철씨의 ‘장경각에서 각수(刻手)를 만나다’다.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는 추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구양순필체의 글씨는 예술이다. 그 글씨를 쓴 사람도 그렇지만 그것을 팔만 개가 넘는 경판에 새긴 각수들의 솜씨는 실로 대단하다. 화자는 장경각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각수를 만난다. 발상은 신선하지만 주제나 의미의 확장이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 겨룬 이는 최세희·김석이씨다. 우연히 두 사람 다 제목이 ‘솟대’다. 한층 깊고 새로워진 ‘솟대’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오승철·강현덕(집필 강현덕)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늦게 도착한 원고는 다음 달에 심사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