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벼랑위의 사랑 - 차창룡

heystar 2011. 3. 29. 12:27

 

         벼랑 위의 사랑

 

                                     차창룡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거주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야윈 상록수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나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여,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졌고,

세상은 우리를 받쳐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는구나.

 

버릇처럼 벼랑 위로 돌아왔지만 보이지 않게 무너지는 법,

평생 벼랑에서 살 수는 없어, 당신은 내 마음을 떠나고 있었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지는 법인지,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내 마음은 항상 낭떠러지였다, 어차피 죽을 용기도 없는 것들아,

벼랑은 암시랑도 않다는 표정으로 다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 출처: 차창룡시집 <벼랑 위의 사랑>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했다

 

                      차창룡

 

하기야, 죽음이란 게 뭐 특별한 것이던가?

더욱이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란 구경거리도 못 되는 것,

황사가 자욱한 2001년 3월 7일 아침 7시,

노숙자 김종식(48)씨가 죽은 지 보름만에 발견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음이란 잠에 불과하다.

동대문야구장 공중전화부스 옆,

김씨는 주변 상가에서 내다버린 쓰레기더미와 함께 깊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 속에서 그는 영양실조와 추위에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김씨의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보름 동안 약 700여 명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김씨 옆에서 전화를 걸었으나,

죽은 채로 잠들어 있는 김씨의 꿈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썩어가는 냄새를 털어내며 그들은

서둘러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발견 당시 김씨의 얼굴과 손의 살점이 대부분 뜯겨나간 상태였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밤에는 고양이가 뜯어먹고

배부른 고양이 몰래 들쥐가 뜯어먹고

낮에는 비둘기가 쪼아 먹은 것일 뿐,

 

눈과 햇볕과 바람과 시간이 모여

김씨의 주검을 놓고 영산회(靈山會)를 펼친 것일 뿐,

몸으로 펼친 보름 동안의 긴 설법을

눈은 햇볕으로 듣고

시간은 바람으로 기록하고,

아 그리하여 그 긴 설법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 출처: 차창룡시집 『나무 물고기』

시인, 승려 

- 1966년 전라남도 곡성

-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 1989년 <문학과 사회> 시 등단

-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

- 시집 <해가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위의 사랑>

- 서울여자대학교, 중앙대학교강사

- 2010년 승가에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