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선 대표시
그리다
박 해 성
하도 잠이 안 와서 새 한 마리 그렸지요
형형한 눈매에다 잘 벼린 발톱까지
날개는 접어두었소, 행여 날아 갈까봐
그만 자자, 불 끄고 겨우 눈을 붙였더니 웅크렸던 그 새가
커다란 죽지 털고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내 발 밑에 엎드렸소
나 그의 깃털에 묻혀 먼 하늘 훨훨 날다
동백 지는 소리에 화들짝 둘러보니
산 한 채 뿌리째 뽑아 움켜쥐고 돌아왔소
내 안에 터를 잡아 산을 옮겨 심었지요
밤이면 그 산이 우렁우렁 앓는 소리
통증은 썩을 줄 몰라 무덤처럼 쌓이는데
어느 밤중 폭풍우가 말을 몰고 내달았소
천지개벽, 피 묻은 알을 깨고 부화하듯
홀연히 봉분을 박차고 활개 치는 한 마리 새
아 나는 새였구나, 나 모르게 새였구나! 첩첩 전생을 넘어
구만리 창천을 건너 한 세상 나뭇가지에 잠시 날개 쉬어가는
구전설화 숲속에서 울다가 노래하다
어느새 내 머리엔 억새꽃이 소슬하고
꿈속의 꿈을 꿈꾸던 새소리는 꿈만 같소
- 박해성 시집『루머처럼, 유머처럼』(2015, 현대시학 시인선 17)
- 박해성의 시작노트
동해 거진 바닷가, 자정은 이미 넘었다. 영하 17도, 나와 카메라는 아까부터 꼼짝 않고 별을 응시하고 있다. 그때 무언가 불현듯 나를 덮친다, 그것은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다. 하지만 나는 꼼짝없이 사로잡힌다. 이렇듯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시를 나는 두려워한다. 그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 때문에 두려워 거부할 수가 없다.
옷도 밥도 안 되는 시에 홀려 밤새도록 자판을 더듬다가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면 “고생을 사서 한다”고 쯧쯧 혀를 차는 이가 있다. 그래, 누구는 돈을 주고 분에 넘치는 의자나 빽, 혹은 모자를 사기도 한다는데 나는 기꺼이 고생을 샀으니 얼마나 착한가?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꿈을 꾸고 그 꿈들은 말이 되어야 하고, 나는 말과 씨름해서 최선이든 최악이든 그걸 형상화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뭘 썼다면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거예요” 나 또한 그러하다.
[출처] 『정형시학』2016, 봄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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