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학 3

나의 고래를 위하여 - 정일근

나의 고래를 위하여 정일근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면 당신의 전생은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를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를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 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 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수 없어 저기, 고래! 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좋은 시 2021.07.11

모란도

모란도 박해성 그가 떠난 서라벌에 가을비가 흩날린다 여자는 입술 깨물고 모란에 몰두한다 미친 듯 신들린 듯이 피는 꽃이 낭자하다 맹목의 백치인양 먹먹한 저 부귀영화 상투적인, 관념적인, 그러나 인간적으로 어쩌면 선덕여왕보다 더 외로울지 몰라, 여덟 폭 병풍 앞에 이별의 잔 마주 놓고 무명지를 깨물어 혈서라도 쓸 것을, 그녀가 붓을 헹군다, 한恨이라도 풀어내듯 - 한국동서문학 2020, 겨울호 수록

박해성의 시조 202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