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수박은 파도의 기억에 잠겨 - 김혜순

heystar 2013. 10. 26. 16:56

   수박은 파도의 기억에 잠겨

 

                                             김혜순

 

 

나는 조용히 편지를 씁니다

검은 스웨터를 뚫고 수박 냄새가 만개한다고 씁니다

사실 이 나이의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죄를 짓는 일과 같습니다

수박에게나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세상의 저속을 생각해 봅니다

눈을 감으면 눈 속의 눈을 감으면 눈 속의 눈 속의 눈을 감으면

하늘보다 더 어두운 바다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깊은 바다를 두 주먹으로 텅텅 두드리며 불러 봅니다

밤바다여 태풍을 보신 밤바다여

그렇게 이름을 부르자 그 파도가 나에게 와서 하나의 수박이 되었습니다

밤에는 수박이 더욱 커집니다

숨어서 혼자 익는 수박의 당도는 매우 높습니다

나는 수박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만

수박에게 나의 파도여 그렇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러닝머신 위를 달릴 때는

마치 파도 위를 뛰는 여자처럼

수박이 헬스클럽까지 따라오게 해서는 안 되었다고 되뇌고 되뇝니다

나는 수박을 품고

수박 향기 자욱한 저녁에

깊은 파도 소리를 듣습니다

그 검은 큰 밤바다가 실내를 가득 채우는 걸 바라보며

가슴에 박힌 수박을 조용히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나는 편지를 보내지 않기로 합니다

 

찢어진 편지의 찢어진 영혼에게 조용히 두 손을 합장해 봅니다

                                                  

                                                                               - 월간 『현대시』2013, 3월호에서

 

1955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건국대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9년 《문학과 지성》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등.

저서; 동화 『마음속의 잉카』 여행기 『들끓는 사랑』등.

수상; 1997년 김수영문학상, 2000년 현대시 작품상 수상. 

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中.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항 - 김요일  (0) 2013.11.13
집시의 시집 - 기형도  (0) 2013.11.12
만복사 저포기 - 송재학  (0) 2013.10.13
무덤 사이에서 - 박형준  (0) 2013.10.13
직소폭포 - 안도현  (0) 201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