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집터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
김 용 택
논두렁콩이 잘되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구, 어머니의 살은 콩알처럼 햇볕에 탄다.
콩은 낫으로 베지 않고 호미로 꺾는다.
뿌리째 뽑히기도 해서 흙을 탈탈 털며 핸드폰을 받는다.
응, 응, 응, 그래 잘 있다. 너는? 올해는 콩들이 다닥다닥 붙었구나.
그래, 한 달이 크면 한 달이 작게 마련이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머니, 그건 이제 야생 감나무에게도 해당되지 않은 옛말입니다.
나는 다달이 작고, 넘을 고개는 오를수록 까마득하게 가파르기만 합니다.
내년이 있어서, 농사꾼들은 그래도 그 말을 믿고 산단다.
퇴근할 때 붓꽃을 꺾어 들고 강 길을 걸었다.
아내는 강 건너 밭둑에서 나물을 뜯고
아이들은 보리밭 매는 할머니 곁에서
강 건너온 흰 나비를 쫒고 놀았다.
아내는 할 말이 많은 날은 오래오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문 산을 머리에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강물에 어른거리는
햇볕이 이마에 따갑다는 것을
아내도 알게 되었다. 바짝 메마른 입술,
하얀 수건을 쓰고 아내가 마당에 앉아 콩을 털 때쯤이면
마른 감잎들이 마당 구석으로 끌려갔다. 아이들은 달아나는 콩을 줍고
어머니는 강 건너 밭에서 콩을 가져왔다.
뒤틀린 마른 콩깍지 끝에서 불꽃이 일고 콩깍지가 터지면서 다시 뒤틀리고
한쪽 얼굴이 까맣게 탄 콩이 튀어 부엌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변에서는 찔레꽃 붉은 열매가 익는다. 콩이 많이 열기도 했구나.
올해도 빈 콩깍지같이 빈 집 몇 채가 저절로 폭삭 내려앉으며,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마을에서 사라졌다. 집이 사라지니,
저쪽 들길이 문득 나타나 텅 비는구나.
허망하다.
벌레 먹은 콩잎, 그 구멍으로 햇살이 새어 들고,
구멍이 숭숭 뚫린 런닝구 사이로 어머니의 살은 지금도 붉게 탄다.
우리 집 바로 뒤 당숙모네 집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섬진강』, 『맑은 날』,『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그리운 꽃편지』,『그대 거침없는 사람』,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등.
-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작은 마을』『섬진강 이야기 1, 2』등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 수상; 김수영 문학상, 김소월 문학상, 2012년 제7회 윤동주문학상 수상.
[출처]웹진 시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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