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은- 김갑주
달빛등 밝혀놓고 책 읽은 벌레 따라
물감 들인 종이 위에 시를 쓰는 잎새 따라
그리운 창을 못 넘고 널브러진 독백 따라
기억의 실꾸리를 감아대는 침목 따라
흑백필름 돌려대는 차창의 영상 따라
진하게 보따리 푸는 간이역의 인정 따라
가는 곳 알 수 없어 몸을 맡긴 발길 따라
어둠 속 조리질한 잔별 건진 냇물 따라
찬비가 가슴 적시는 낯선 곳의 불빛 따라

[차상]
스마트 코리아 -정황수
여기로 모이세요, 뒤처지면 손햅니다
거리에 모든 것이 빈틈없이 짜여 있어
언제든 찾으신다면 당신께 달려가요
살며시 오세요, 안전띠는 필요 없고
앞장 서 깃발 들면 팔로어가 모여요
사각의 스마트폰은 항상 곁에 두세요
오프라인 고집하면 거들떠도 안 봐요
허리 굽은 어르신들 목에 걸린 아날로그
소통도 디지털이라 골동품상 가래요
인터넷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머리 터져 코 깨져도 꾹 참고 따르래요
왼 종일 빠름빠름빠름 외치는 속도선(善)에
[차하]
오후 세 시 -이은재
앞산에 소풍 나온
한 가족 뭉게구름
이내 맘 흔들어 놓고
바람 끝 떠나간 뒤
천만근 눈꺼풀 위에
부챗살 편 그리움
◆ 심사평
정장 차림도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편안함과 개성을 담아낸다면 보는 이의 눈길을 끌고 마음까지 움직이게 된다. 사람에게 옷차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품이듯, 시조 또한 격식보다 깊이와 품격을 지녀야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오랜 논의 끝에 김갑주의 ‘가을은’을 이번 달의 장원으로 뽑았다. 다른 작품에 비해 서정의 폭과 깊이가 느껴지고, ‘물감 들인 종이 위에 시를 쓰는 잎새’처럼 표현 감각이 남다르고 자연스럽다. 각 장의 끝에 배치된 각운이 다소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서정의 무게가 살아 있다.
차상은 정황수의 ‘스마트 코리아’이다. 이 시대의 오늘을 비판적으로 우려낸 작품이다. 구어체의 활달한 어법이 경쾌하다.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도 고른 수준을 보였다.
차하는 이은재의 ‘오후 세시’에게 돌아간다. 오후 3시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면서 종장에서 깊이를 잘 담아냈다.
심사위원=권갑하·이종문(대표집필 : 권갑하)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