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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김만중 문학상 수상작 <시조로 읽는 구운몽> - 이교상

heystar 2012. 9. 1. 10:52

 

제3회 김만중 문학상

 

 

대상 : 장편소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임종욱:51∙경기화성) 상금 5000만 원.

 

분야별 수상작

 

▶소설 부문

금상 양진영(55)씨 ‘올무’, 은상 김문주(64)씨 ‘거울 뒤의 남자’

▶시 부문

금상 이교상(50)씨 ‘시조로 읽는 구운몽’, 은상 임경묵(42)씨 ‘매화초옥도에 들다’

▶희곡 부문

금상 강석현(44)씨 ‘귀불귀-김시습과의 인터뷰’, 은상 김영근(48)씨 ‘조선으로 베다’ 가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각 부문별 금상과 은상 수상자에게 상패와 함께 각각 1000만원과 5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시상식 : 오는 11월 1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문학제와 함께 열릴 예정.

 

심사위원 : 소설가 김주영(심사위원장)

시 부문 : 안도현, 이승하, 이처기

소설 부문 : 박상우, 권지예, 전경린

희곡 부문 : 박정기, 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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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로 읽는 구운몽

                                  ―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슬 내린 새벽

혼자 달을 바라보던 한 남자가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

사람의 생애生涯와 비의悲意를 낭창낭창 짊어지고

강 건너 고개 넘어 굽이굽이 흘러온

남해에서

검붉은 욕망의 사설辭說

파도 위에

던지고, 던지고

 

 

1

안개에 둘러싸인 꽃의 밀담密談 들어본다.

 

옛날, 아주 옛날 중국 당나라 때 이야긴데, 서역 천축국에서 건너온 신선 같은 고승高僧 육관대사가 사방팔방 기기묘묘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단풍나무 소나무 박달나무 삼나무 등나무 녹나무들이 우거질 대로 우거진 남악 형산 일흔 두 개 봉우리 중 연화봉에 터 잡아 그윽하게 법당 짓고, 날이면 날마다 산문 활짝 열어 동굴처럼 세상 어두워지지 않도록 솔향기 은은히 날려 보내고 옥구슬 같은 폭포수 끝없이 흘려보내며 불법을 베풀었는데.

 

……혼란한 전국시대였던가, 간신의 모략으로 유배당해온 굴원이 장편 서정시 ‘이소離巢’를 읊었고, 두보가 동정호의 아름다운 악양루에 올라 ‘등악양루登岳陽樓’의 시를 단숨에 토해냈던 그때,

 

2

누구나 우러러본

선지자先知者가 있었으나

 

겨울이 흘러가고

다시 봄이 찾아와도

 

떠도는

바람과 구름

발(足)을 갖지 못했으니

 

3

두문불출, 고요히 법당에 앉아 있어도 육관대사는 천리만리를 보고, 눈을 감고도 세상 구석구석 박혀 있는 좁쌀 같은 어둠까지 모두 읽었으니. 그 염력念力 하도 신통하고 방통해 이내 소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잣거리를 벗어나 온천지에 자자하게 퍼졌는데.

 

어느 날, 양자강 하류 더 넓게 펼쳐진 동정호의 용왕이 육관대사 설법 한 번 들어보려고 만사 제쳐두고 철갑상어 은어 붕어 미꾸라지 메기 금강모치 독중개 돌마자 두렁허리 무지개송어 참갈겨니 버들치 가물치들을 거느리고 연화봉을 찾았는데. 그에 육관대사가 제자 성진을 보내 고마움을 전할 때, 형산에 살고 있던 고고한 선녀 위 부인도 급히 팔선녀를 대사에게 보내 여차저차해서 법회에 참석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는데. 그날이었지, 용왕의 환대로 거나하게 술에 취한 성진은 마치 구름 위에 올라탄 것처럼 아롱아롱 그렇게 혼자 한껏 흥에 겨웠는데. 때마침 연화봉 구경하며 돌아가던 아리따운 팔선녀를 석교에서 본 순간 번쩍, 정신이 든 성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말 섞으며 희희낙락 놀았는데.

 

……그래, 예나 지금이나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짜릿하고 감질疳疾나게 재미있는 것은 꽃놀이패, 그 붉고 물컹하고 달콤하고 쫄깃하고 시큼한 음담패설 같은 농담. 고것이 그 어떤 산해진미山海珍味보다도 맛있고 또 씹으면 씹을수록 입에 착착 달라붙는 봄도다리 육질 같아, 성진은 세상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줄 모르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인 줄 모르고 난생 처음 사랑에 흠뻑 빠지게 되었는데. 낮과 밤 구별 없이 겁도 없이 복사꽃 같은 팔선녀의 얼굴 부처의 몸에 날마다 그리고 그렸는데. 적막강산 같은 시간 질겅질겅 씹으며 세상 부귀와 공명 몰래 꿈꾸다가 꿈을 꾸다가

그만 육관대사에게 그 사실 들켜 팔선녀와 뿔뿔이 흩어져 지옥으로, 온갖 금수禽獸가 우글거리는 속세俗世로 쫓겨났는데.

 

그렇지, 한 번 맛본 그 맛 어디 쉽게 잊었겠나?

 

4

망초꽃 같은 밤이

얼마나 또 흘렀는지

 

세상에 비가 왔는지

바람이 불었는지

 

화들짝,

눈 뜨고 보니 거기

낯선 내가 있었다

 

5

나는,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 양소유로 다시 태어났지.

 

아버지는 신선이 되려고 집을 떠나고, 홀어머니 품에서 일찍 철든 나는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 당당하게 살아남기 위해 열다섯 살 먹었을 때 가슴에 큰 뜻 하나 알처럼 품고 과거보러 가던 중 화음현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어여쁘고 귀엽고 얌전하고 정숙한 진어사의 딸을 보고 반해 어린 나이였지만 조숙할 대로 조숙한 나는 채봉과 굳게 혼인을 약속했는데. 그러나 그해 나라가 어수선하여 구사량이 난을 일으켜 과거고 뭐고 남전산으로 급히 몸을 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세상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아무도 몰래 몸속에 숨겨놓은 칼 녹슬지 않게 날마다 갈고 갈며 도사에게 배운 음률 주문처럼 읊조리고 또 읊조렸는데. ……그렇게 한 해를 속절없이 보내고 이듬해 다시 과거 보기 위해 경사로 가던 중 배도 고프고 몸 피곤해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낙양 천진교 시회에 참석했는데. 몸보다 마음이 더 허전하고 허기졌던지 그날 밤 그만 나도 모르게 기생 계섬월의 치마폭에 풀썩, 힘없이 쓰러져 아주 요상스러운 꿈을 꾸었는데.

 

아뿔싸, 칼집에서 잘못 뽑힌 칼이 허공을 벴으니…….

 

6

휜 구름 잡아먹은

황사비 울대 같은

 

엄나무 목덜미에

불거진 핏대 같은

 

천지간,

바람이 불어

세상은 늘 아득하고

 

7

마침내 경사에 도착한 나는 어머니의 친척 두련사의 주선으로 발랄하고 영특한 처자 경패를 만났지.

 

그해 과거에 급제하고, 정도사의 사위로 찍혀 어쩔 수 없이 경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며 미적거리고 있을 때 화가 난 경패는 내가 거문고를 탄다는 핑계로 여자 도사로 꾸며 접근한 것이 괘심해 시비를 선녀처럼 꾸며 날 유혹하게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애교덩어리 가춘운과 함께 밤이슬 내리고 달이 지는 줄도 모르고 아침이 올 때까지 입김과 향기로운 살내음에 흠씬 취하고 젖었는데. 그때, 마침 하북에서 역모의 조짐이 일어 단숨에 절도사로 임명된 나는 세 왕의 불만을 다스리고, 다시 계섬월을 만나 반가움에 원앙 베개와 비취 이불 깔아놓고 뜨겁게 아주 뜨겁게 정을 나누었는데. 다음날 깨어나고 보니 계섬월은 안보이고 내 옆에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가 한 떨기 모란꽃처럼 방그레 웃고 있었는데. ……경사로 돌아온 나는 우연히 오래전에 잡혀와 궁녀가 된 채봉을 보고 가슴 끙끙 앓다가 애를 태우다가, 어느 날 황제가 베푼 환선시紈扇詩에 차운次韻하여 다시 채봉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러던 중 달 밝은 밤에 문득 난양공주의 퉁소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에 화답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駙馬로 정해졌지만, 경패와의 혼인 약속을 핑계로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다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때마침 토번왕이 쳐들어와 나는 다시 대원수가 되어 출전하게 되었는데.

 

그날 밤, 날 죽이기 위해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 심요연을 단숨에 굴복시켜 인연을 맺고. 그 와중에 백룡담에서 용왕의 딸 백릉파를 도와줘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또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8

흰 구름 바라보다

나른해진 몸을 안고

 

낮달 둥둥 떠다니는

허공을 끌어안고

 

훨훨훨,

꿈속을 날며

삼켜먹은 꽃이라니!

 

9

부귀도 권세마저 하나씩 내려놓고.

 

우여곡절 끝에 영양공주가 된 정경패와 난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고향에 계신 노모를 모시고 와 그동안 연을 맺은 진채봉 계섬월 적경홍 가춘운 심요연 백릉파와 함께 오붓하고 조용하고 느릿하게 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생일날 종남산에 올라 팔선녀와 한가롭게 가무를 즐기며 놀다가 문득 먼저 살다간 영웅들의 황폐해지고 잡풀 무성히 덮인 무덤을 본 그날부터 자꾸 몸 노곤해지고 기운이 빠지고…… 되돌아보니, 내 모습 이리저리 뭉게뭉게 떠다니는 구름이었고, 온갖 욕망이 칼춤 추는 세상은 곰팡내와 지린내 가득한 감옥이었고, 시시때때로 골짜구니 휘감아 오른 삶은 매 순간 정신과 육신을 칼끝 위에 세우는 선무당 바람의 모습이었으니. 그때 호승이 찾아와 날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몸에 깊이 박힌 수많은 칠흑의 가시 뽑아내 적멸寂滅로 가는 길 선명하게 보지 못했다면 나도 팔선녀도 영원히 극락세계에 들지 못했을 터, 절대.

 

오늘도, 남해금산 보리암 풍경風磬소리 세상 멀리멀리 퍼지고 

 

 

지족해협을 읽다

 

“죽방렴 고기라서 맛이 일품”이라는 말에 그 좁은 물목 빠른 물살들을 온몸으로 읽은 물고기의 생과 문득 대면하고 싶었다

 

수심 얕은 갯벌에 깊이 박힌 참나무 말뚝마다 푸른 대나무로 촘촘히 발 엮고, 주렴처럼 그물 둘러놓은 V자형 협곡에 갇힌 고기의 운명을 나는 생각했다 부단히, 심해의 어둠 지느러미로 털어내 쫀득해진 삶을 둥글게, 둥글게 떠올렸다 바닥 물컹하게 가라앉은 개흙, 그 밤이 토해놓은 썰물과 밀물의 시간을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고단했을 물고기 그림자 거슬러 따라가다가 빗살무늬 붉은 노을 비늘 같은 앞섶에 차곡차곡 저장하고 동여맨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날마다 어지럽고 탁한 마음 물살로 닦고 닦으면 마침내 죽어서도 향기로워진다는 고승대덕高僧大德 장엄염불莊嚴念佛 소리도 들었다 물고기 살점마다 박혀 있는 바다의 묵언默言을 한 점 한 점 나는 천천히 온몸으로 받아 읽고 간절히, 씹어 먹었다

 

저 해협, 따뜻하게 안고 흘러가는 봄, 밤, 길

 

 

적소謫所의 밤

 

1

불면의 숱한 밤이 바닷가에 모여앉아 너무 멀어 가지 못해 둥근 달 띄웁니다

귀촉도, 섬 속에 갇혀 딸꾹질을 하고요

 

2

그네처럼 흔들리는 조릿대에 둘러싸여 파도가 갉아먹는 내 몸이 섬입니다 밤새워 되새김질 하는 저 별도 섬입니다

 

3

날실과 씨실로 짠 광목廣木 같은 달빛이 벼랑길 아득함을 한 장 한 장 덮습니다

해풍에 지워진 밀서密書 다시 썼다 지우고

 

 

남해 금산 휘파람새

 

너럭바위 에둘러 시누대 길을 따라 거친 숨 몰아쉬며 봉수대에 오릅니다

살바람 입 짠 소문들 땀으로 씻었습니다

만 가지 물의 풍경 일렁이는 바다 위에 오래전에 잃어버린 내 모습 반짝입니다 섬섬閃閃한 벼랑의 그렁지 햇살 속에 잠기고……

울울한 어둠의 집 뒤안처럼 막막했던 구렁텅 가로질러 날아온 새 한 마리

고단한 인간의 생을 휘파람으로 읽습니다

 

 

그리운 노도

 

먼 길 오느라고 늦어버린 시간이지만

꿈자리 명당으로 반짝이는 벽련마을

울창한 동백나무가 바자울* 보입니다

 

바래길** 풍경들은 눈시울에 내걸리고

문득, 한 사람이 푸드득 날아갑니다

정박한 포구의 저녁 노을구름 됩니다

 

얼마나 바라봐야 내 그리움 눈을 뜰지

혼자 되작인 마음 파도에 얹어놓고

호접몽 아득한 세상 바다에 펼칩니다

 

*대,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로 엮어 만든 울타리.

**바다의 해초류와 조개 등을 담아 오던 길.

 

 

당선소감

처음 내가 남해를 찾은 이유는 순전히 보리암 때문이었지만, 그때 금산에서 바라본 만경창파를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그 풍경의 감흥은 세상이 자꾸 먹먹해질수록 더욱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와 살면서 언제나 돌아가고픈 마음의 고향 혹은 평화롭고 따뜻함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느 날 혼자 문득 찾아가도 좋을 바다 한쪽에 조용하게 세 들어 오랫동안 하냥 고요해지고 싶은 것이다.

 

문학이 지닌 창조적 열망을 선도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재정이 넉넉하지 않는 지자체의 입장에서 문학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지역을 떠나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감사할 일이다.

 

부족한 글을 좋게 읽어 주시고 선해 주신 분들께 고개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교상 :

1963년 경북 김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시집 <긴 이별 짧은 편지>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