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마당 약전略傳- 관효환

heystar 2018. 12. 21. 17:09

     마당 약전略傳 

                              곽효환

   

나무울타리나 토담에 에워싸인 나는

갓 걸음을 뗀 꼬맹이들과 닭, 오리, 강아지의 놀이터이고

저녁엔 모깃불 올리고 멍석 깔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소박한 저녁을 먹는 식당이고

감자 옥수수 수박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랑채였다

 

 

닭장과 개집,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있고

봄 파종의 시작점이고 가을걷이의 종착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다시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걷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뒹굴고 뜀박질하고

나로부터 세상을 향해 무수히 나아가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태어난 아이를 맨 처음 맞고 알린 것도

품어 자라게 한 것도 나의 몫이었다

그 아이가 신랑 신부가 되어

수줍게 초례를 올린 결혼식장이고

그 신랑 신부가 늙어

회갑과 고희 잔치를 연 연회장이며

그렇게 한세월 가고 망자가 된 그들을

먹먹한 가슴으로 떠나보낸 장례식장이었다

 

윷 놀고 널뛰고 떡메 치는

마을 사람들의 흥성거리는 잔치 터이고

고된 농사일 잠시 멈추고

농주로 지친 몸을 달래는 휴식처였다

지신 밟고 농악 놀고 풍년과 안녕을 빌던 사람들

나는 그들의 처음이고 전부이고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곧 나였다

 

먼 아버지 적부터 연년이 이어져 내려오다

이제 놀이도 잔치도 예식도 사람도 사라지고

존재마저 희미해진 내 이름은

 

- 작품출처; 곽효환 시집 『너는』, 문학과 지성사, 2018.

- 시집; 『지도에 없는 집』『슬픔의 뼈대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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