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 - 박 해 성
하도 잠이 안 와서 새 한 마리 그렸지요
형형한 눈매에다 잘 벼린 발톱까지
날개는 접어두었소, 행여 날아 갈까봐
그만 자자, 불 끄고 겨우 눈을 붙였더니 웅크렸던 그 새가
커다란 죽지 털고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내 발 밑에 엎드렸소
나 그의 깃털에 묻혀 먼 하늘 훨훨 날다
동백 지는 소리에 화들짝 둘러보니
산 한 채 뿌리째 뽑아 움켜쥐고 돌아왔소
내 안에 터를 잡아 산을 옮겨 심었지요
밤이면 그 산이 우렁우렁 앓는 소리
통증은 썩을 줄 몰라 무덤처럼 쌓이는데
어느 밤중 폭풍우가 말을 몰고 내달았소
천지개벽, 피 묻은 알을 깨고 부화하듯
홀연히 봉분을 박차고 활개 치는 한 마리 새
아 나는 새였구나, 나 모르게 새였구나! 첩첩 전생을 넘어
구만리 창천을 건너 한 세상 나뭇가지에 잠시 날개 쉬어가는
구전설화 숲속에서 울다가 노래하다
어느새 내 머리엔 억새꽃이 소슬하고
꿈속의 꿈을 꿈꾸던 새소리는 꿈만 같소
[출처] 박해성 시집 『루머처럼, 유머처럼』 2015, 현대시학 시인선 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