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 이기인

heystar 2011. 3. 7. 10:48

어깨 위로 떨어지는 사소한 편지

 

                                        이기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는 내가 당신의 어깨를 본다

내일은 소리 없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나는 초조를 잃어버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더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첫눈이 쌓여서 가는 길이 환하고 넓어질 것 같다

소처럼 미안하게 걸어 다니는 일이 이어지지만 끝까지 정든 집으로 몸을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닮아가는 구두 짝을 우스꽝스럽게 벗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밤늦게 지붕을 걸어 다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껴안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벽에 걸어놓은 옷에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말을 알아듣고

벗어놓은 양말에 뭉쳐진 검정 언어를 잘 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트리스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삐걱삐걱 고백을 오늘밤에는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어깨는 초라한 편지를 쓰는 불빛을 걱정하다가

아득한 절벽에 놓인 방의 열쇠를 나에게 주었다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별들이 옥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다

뒤척이는 불빛이 나비처럼 긴 밤을 간다

 

                                                                [출처] 이기인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 

 

1967년 인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

2005년  시집「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창비

2010년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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