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마리 로랑생 - 박해성

heystar 2014. 3. 19. 18:21

 

                  아주 특별한 사랑  - 마리 로랑생

 

 

   사랑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같아서 상처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말한다 -사랑은 아름답다-고, 하여 세기의 사랑은 시를 낳고, 노래를 낳고, 그림이나 조각 등을 낳는 놀라운 예술의 원천이기도 했다. 사랑의 그 효용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은 1883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귀족가문 출신인 아버지는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어머니와 갈등 끝에 마리는 미술학교를 선택했다.

   1905년 마리는 당시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세탁선(Bateau-Lavoir)이라 불리던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목조로 된 허름한 아파트의 일원이 된다. 피카소,브라크 등을 위시한 젊은 시인, 비평가 등이 붐비던 이곳은 후에 20세기 예술 사조를 지배하는 큐비즘이 탄생한 장소가 되면서 유명해지게 된다. 여기서 마리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리 로랑생은 세탁선의 입체파 화가들 틈에서 활동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고집했다.

“내가 입체파가 되지 않은 것은 아무리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녀는 고백한다.

   1912년 그녀의 첫 개인전은 마리 로랑생이 파리 화단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이어 1920년 로마의 개인전에서도 호평을 받으면서 마리는 몇 안 되는 여성 큐비즘 화가로 알려진다. 이는 세탁선의 친구인 피카소와 브라크 등 입체파 화가들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마리는 그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추상적인 여성상을 그려낸다.

    마리의 그림은 점차적으로 주제나 색조, 기법 등이 매우 여성스러운 쪽으로 기울었다. 원근법이나 선을 배제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곡선과  면을 중시한 그녀의 그림 속 인물들은 슬픔에 젖은 파스텔톤의 몽환적 표정이다. 

    그러나 큐비즘이 주류였던 당시에 그녀의 그림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마리는 당대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로만 여겨졌다. 조각가 로댕은 그녀를 가리켜 '야수파의 소녀'라 놀렸고, 시인 장 콕토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의 덫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으로 비유하기도 했지만 마리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자기 자신이길 고집했다. 

    이러한 마리의 개성은 그녀의 작품을 특징짓는 ‘여성성(femininity)’이라는 어휘로 표상된다. 그녀는 앙드레 살몽으로부터 "새로움을 창조한 이 시대의 위대한 발명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혹자는 마리의 페미니즘이 큐비즘의 오만한 남성성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세탁선에 드나들던 기욤과 마리는 우여곡절 끝에 1912년 결별한다. 실연의 아픔을 읊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는 역설적으로 유명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기욤과 이별한 마리는 1913년 모친 사망 후 독일 귀족 화가 오토 폰 바트겐(Otto von Waëtjen)과 결혼한다. 그리고 불과 한 달여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혼인신고와 동시에 독일인으로 국적이 바뀌었던 마리는 조국 프랑스에 돌아올 수 없는 신분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그녀가 37살 되던 1920년 프랑스로부터 귀국을 허락 받는다.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1921년 독일인 남편과의 정식 이혼을 발표한다.  연인 아폴리네르는 이미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난 후였다.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마리에게 파리는 냉정했다. 미술사조는 큐비즘이 주류가 되었고 그녀의 화풍은 구태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녀는 화가보다도 시인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더 유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고 유화, 수채화 드로잉뿐만 아니라 벽지 무늬나, 책의 삽화, 석판화, 발레의 무대장치, 또는 양탄자나 복식도안을 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옛날의 명성을 회복하자 당대 사교계 여성들에게 초상화 주문이 밀려 들었다.

   1923년, 코코샤넬은 마리에게 자신의 초상화 제작을 주문한다. 그러나 샤넬은 완성된 초상화가 자신과 다르다고 화가에게 되돌려 보냈다. 나른하고 애매한 곡선에다 번진 듯 어중간한 색채, 그리고 몽환적인 분위기, 고뇌하는 듯한 표정과 마르고 창백한 피부의 40대 여인 - 화가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모델의 내면을 투시한 것이리라. 그러나 샤넬에게 퇴짜 맞은 이 초상화는 현재 마리 로랑생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여담이지만 『마리 로랑생』이라는 전기를 쓴 플로라 그루(Flora Groult)의 회상에 의하면 마리의 작업실 벽에는 “기욤의 어머니가 나에게 준 것”이라고 마리가 말하는 기타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가끔 그림에 등장하는 소품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 그림 속 소녀가 들고 있는 기타가 연인 마리에게 전해진 기욤 아폴리네르의 유품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랑 - 더 이상 말은 필요치 않다.

    마리 로랑생은 20대 시절의 나탈리 클리포드 버니를 비롯해 일생동안 다양한 여자 친구와 동성애에 빠졌지만 그 중에서도 니꼴 구르와의 사랑은 특별하다. 마리가 독일에서 암담한 결혼생활을 하던 시기 니꼴은 물심 양면으로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니꼴은 마리가 원하는 프랑스의 소식과 물건들을 날라다 주었을 뿐 아니라 무책임한 바람둥이 남편 대신 외로운 마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따듯하게 감싸준 유일한 친구였다. 고독과 절망 속에서 마리는 니꼴 구르와의 사랑으로 정신적 안정을 찾으면서 <비둘기와 두 여자> <백조와 젊은 여자들> 등 좋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   

 

 1956년 6월 8일, 마리 로랑생은 73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마리 로랑생 - 사랑에 운명을 걸고』의 저자인 플로라 그루의 말에 의하면 

 “야수파 창시자의 일원이었으나 입체파 성향을 지녔으며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굴레에도 갇히지 않았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들은 최근 페미니즘 미술사학계의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83년, 마리 로랑생의 100번째 생일날 the Musée Marie Laurencin (마리로랑생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 미술관은 마리의 조국 프랑스가 아니라 놀랍게도 일본 나가노에 설립된 것이다. 마리의 유화, 수채화, 등의 그림은 물론 스케치북과 개인문서 등등을 포함해 500여점이 넘는 콜렉션을 소장했다고 밝힌 일본 미술관측은 나가노가 마리 로랑생의 본고장이라 큰소리치고 있다. 프랑스는 어영부영하는 사이 자국의 훌륭한 예술가를 눈 밝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남의 일이 아님을 명심해야겠다. ■


 

<참고>

- 『밤의 수첩』 마리 로랑생 지음, 오성춘 옮김. 1992년, 도서출판 한빛.

- 『마리 로랑생 - 사랑에 운명을 걸고』 플로라 그루 지음, 강만원 옮김. 1994년, 도서출판 까치.

- http://en.wikipedia.org/wiki

- http://greencab.co.jp/laurencin/museum/e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