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3

파이

파이 박해성 읽던 신문을 가슴에 덮고 설핏 잠에 빠집니다 38.5도 신열을 딛고 움트는 떡잎,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묵찌빠, 적막이 실핏줄처럼 뿌리를 내립니다 사회면 비명을 씹는 염소인양 지상의 나날들을 산채로 씹어 먹는 잡식성 몸살은 오, 어느새 뇌수를 뚫고 잔가지가 무성합니다 무성한 뿔을 인 사슴이 겅중겅중 뛰어다닙니다 천방지축 달리다가 달리의 시계를 밟았나요,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박살 난 유리에 천둥번개가 스칩니까 소름처럼 파릇파릇 잡초가 돋아납니까 백지 위에 고삐를 풀어놓은 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황제에게 꼬리치는 것, 뱀피구두를 신은 것, 훈련된 것, 다족류, 발광하는 것들, 말할 수 없는 것, 방금 막 신을 버린 것, 들여다보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것들, 백과사전에도 없는 것, 토마스 핀천..

박해성의 시 2021.01.18

영옥 - 이경림

영옥 이경림 영옥이 도착한다 한권의 책으로 한 쪽의 표지로 몇 쪽의 갈피로, 옆인 듯 앞인 듯 획 돌아보는 듯 희미하게 웃는 듯 볼이 통통한 영옥 눈이 매혹적인 영옥 머리칼이 칠흑인 영옥 배경은 검은 숲, 회백색의 개울, 그 건너 뽀얀 몽돌 밭 그러나 영옥은 어디 갔나? 갈피 속의 영옥은 잠깐의 쿠바, 어느날의 광화문, 막 지나가는 연신내 부산, 대구, 비 추적대는 날의 왕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의자, 어색한 술자리, 시 그 무엇보다 깊은 不治 영옥은 무엇인가? 맨발로 구만리 심해를 헤매는 눈먼 물고기?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조약돌? 그 파문에 잠시 저희끼리 몸 비비는 물풀? 영옥은 도착한다 지금 막 없는 순환열차를 타고 없는 역에 슬쩍 내려 장검처럼 번쩍이는 햇살에 아득히 미간을..

좋은 시 2018.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