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옥 시인 2

사과와 함께 - 배영옥

사과와 함께 배영옥 르네 마그리트의 마그네틱 사과 한 알 현관문에 붙여놓고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사과의 허락도 없이 문을 따는 사람 나는 이제 더 이상 과수원집 손녀가 아니고 사과도 이미 그때의 사과가 아닌데 국광, 인도, 홍옥……처럼 조금씩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 사과의 고통은 사과가 가장 잘 안다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럼에도 매번 피어나는 사과꽃처럼 봄이면 내 어지럼증은 하얗게 만발하곤 하지만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빨갛게 익어본 적 없는 사람 내가 사과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건 사과의 눈부신 자태 때문이 아니라 사과 이전과 사과 이후의 고통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할아버지도 르네 마그리트도 방문하지 않는 ..

좋은 시 2018.10.09

영옥 - 이경림

영옥 이경림 영옥이 도착한다 한권의 책으로 한 쪽의 표지로 몇 쪽의 갈피로, 옆인 듯 앞인 듯 획 돌아보는 듯 희미하게 웃는 듯 볼이 통통한 영옥 눈이 매혹적인 영옥 머리칼이 칠흑인 영옥 배경은 검은 숲, 회백색의 개울, 그 건너 뽀얀 몽돌 밭 그러나 영옥은 어디 갔나? 갈피 속의 영옥은 잠깐의 쿠바, 어느날의 광화문, 막 지나가는 연신내 부산, 대구, 비 추적대는 날의 왕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의자, 어색한 술자리, 시 그 무엇보다 깊은 不治 영옥은 무엇인가? 맨발로 구만리 심해를 헤매는 눈먼 물고기?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조약돌? 그 파문에 잠시 저희끼리 몸 비비는 물풀? 영옥은 도착한다 지금 막 없는 순환열차를 타고 없는 역에 슬쩍 내려 장검처럼 번쩍이는 햇살에 아득히 미간을..

좋은 시 2018.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