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외규장각 의궤 김석인
갓 쓰고 도포 날리며 행서체로 눈을 뜬
그믐밤 지워버린 등불 같은 가시연꽃
천 년 더 날숨을 쉴까,
물 위에 들숨 얹어
인질로 끌려가서 불어로 꿈꾸는 동안
5대째 벗어둔 의관 앉은 채로 눈이 멀고
내 깜냥 이제 여기까지
사뭇, 슬픔이 인다
환향의 길에 오른 여인들의 행색처럼
차마 버리지 못할 수모 겪은 저 몸뚱이
그리운 말의 지문을 찾아
겉더께를 닦아낸다
온몸이 먹먹해도 향불 같은 마음으로
끝끝내 잊지 않고 찾아온 너를 위해
천 년 더 들숨 쉬고 싶다,
허공에 날숨 던져

차상
숟가락, 보시에 관한 짧은 필름 류미월
허름한 국밥집에 번을 서는 밥숟가락
간단없이 목구멍을 들명나명 공양해온
뜨겁게 몸을 녹이는 봉긋 솟은 손등이다
감자 싹 파란 멍울 도려내며 잠재우고
날카로운 칼날대신 예를 갖춘 굽은 허리
얇아진 가장자리엔 눈빛 절로 반짝인다
두레상에 둘러앉아 달그락 화음을 낼 때
이야기꽃 피워 올린 그 몸짓 따사롭다
모질게 닮아지도록 배가 불룩! 큰 보시
차하
눈의 탁본 김경숙
뿌리 깊은 것들 모두 고요를 털어내고
바람의 안부에 낭창낭창 몸을 열 시간
결 마른 산벚나무 가지 위 여백을 채우는 눈
누군가에게 여백은 점자로 읽혀져서
시린 가슴 녹여낼 하롱하롱 꽃이 피고
감격의 악수를 청한 첫 직장 초대장 되고
큰 대자로 엎어져도 영화가 되는 기념적인 날
작은 다짐 밑줄까지 뚜렷하게 찍히도록
모처럼 본심을 내보인 흰 세상을 껴안다
의궤·환향녀 엮은 장원작 만만치않은 내공 보여줘
김석인의’외규장각 의궤’는 서사적 구조를 탄탄히 구축한 수작이다.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 길 여인들을 동시에 보아내는 눈은 이 작가의 저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엿보게 한다.
류미월의 ‘숟가락, 보시에 관한 짧은 필름’은 한 가정의 내력을 그린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숟가락이 우리 몸을 살리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잘 표현해냈다.
김경숙의 ‘눈의 탁본’은 둘째 수 ‘누군가에게 여백은 점자로 읽혀져서’와 같은 발견의 눈을 높이 산다.
심사위원=오승철·강현덕(대표집필 오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