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수상작

제22회 현대시학신인상당선작 <워낭소리>외 - 권혁찬

heystar 2011. 7. 25. 15:13

                           워낭소리

                                        -지문리의 봄

 

                                                      권 혁 찬 

 

 

                      그리고 5월, 다시 들판에 서 있다

 

수입소와 광우병 사이에서 네발가진 모든 먹구름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더 식음을 전폐했고

제 스스로

물러날 수 없는 것들은 모두가 적막 속에서 기울어갔다

봄이 오고 마을은 또 다시 잠에서 깨어났지만

동네 미루나무와 낡고 위태로운 한우 우사는 두문불출 중이고

오래전 기억상실증을 따라간 후 돌아오지 않는 최씨와

들판에 뿌리박힌 것들은 모두 몇 개의 이정표가 되었을 뿐

더는 이곳의 아침을 몇 줌 태양처럼 깨워주지는 못한다.

저녁이면 싸리문 안쪽으로 네발로 귀가하던 푸른 워낭소리,

그랬다.

마을은 한 때, 보습의 날들이 주인이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수선해 주던 농기구들과

그들의 덜컹거리는 꿈들을 운반해 주던 고샅길들과

아침이면 부스럭, 건너오던 울타리 저쪽의 뜨끈한 안부가 있었다.


한동안 뜸했던 문안을 챙겨 도시 저쪽에서 고향마을로 들어서는데,

뒷산 아카시아가 밥물처럼 허옇게 끓고 있다

인기척은 모두 짐을 싸고 앙상한 축사들

오래전, 내 유년의 머리맡을 부풀리던 농경의 울음들은

모두 누가 치워 버렸을까

 

 

저장고


삽날을 한 잎 베어 문 공터가 붉게 들춰진다.

단단히 밀봉됐던 지표면이 순간의 삽질에 풀려나고

오래 된 아집들이 잘게 잘려져 한 삽씩 올라온다.

이제 머지않아, 이 속엔 또 다른 생태계가 들어찰 것이다

이 속으로 함구될 세월저쪽의 사연들은 나와 구면이다

나도 한때는 주유소 한켠에서 잘 삭은 유전油田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분간 마을버스회사의 직원이다

전화기 속으로 연실 드나드는 석유회사들

공터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몇 개의 질문과 도면들

공사를 한다는 것은 일상의 밀린 청구서들을 허무는 일이다

잘 풀리지 않는 근심의 모서리를 곰곰 찾는 일이며

아직 완공되지 못한 내안의 희망 한 채 건축하는 일이고

그 일상의 머리맡에 내 노모의 알약 또한 장만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몇 개의 날카로운 냉기도

이곳을 통과하면 모두가 잘 데워진 추억이 될 수 있음을,


땀에 젖은 인부하나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한 개비의 심호흡을 길게- 피워 날린다.

그의 이마 어디쯤에서 차디찬 겨울이 잠시 허리를 편다.

 

 

폐 속의 날들

 

 

이럴수가, 내 안에 허공이 들어있었다니


언제인가 나는 몸 하면, 잘 여며진 자루를 떠올렸었다

가을 타작마당 한켠에서

양지바른 툇마루 끝이나 또는 곳간 저쪽으로 옮겨지듯

그렇게 외출을 하고 잠을 자고 일상을 비워내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럴수가

내 안에 이토록, 호흡들이 날기에 좋은 벼랑이 있었다니

그 안에서 바람들은 제 주소지를 찾아 높낮이를 바꾸고

새소리, 벌레울음들 낭창낭창 깊어지기도 했었다니

밤이면 별자리들 폐 속 깊이 들어와 반짝, 박혀들고

아침이면 하루치의 호흡 속에서 지구 하나 통 째로 발려먹고 있었다니,

폐 속 허공의 날들을 생각한다.

더는 비로 완성되지 못한 구름들과 공중 저쪽, 잘못 들른 새들의 기척

늦은 저녁 무거운 골목을 끌고 귀가하던 아버지의 담배연기 까지도

호흡들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사색들의 모퉁이는 점점 더 골똘해지고

가끔은 고향집 뒤꼍에서 내 부주의함을 찌르며 들어오던 낙엽소리와

문득 고개 든 향기로운 슬픔들에 길을 잃기도 했으리라


뒤란에 앉아 회상 한 개비 길게 내뱉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방금 내 안을 빠져나간 심호흡 한 줌 지구 반대편 운석 하나

덜컹, 흔들고 있다.

 

 

아가미 
 

옷장과 컴퓨터 틈새에 비좁게 끼어 잠자던

꺾지 같은 아들놈도

거실 책장과 티비 사이에 낮게 파묻혀 자던

모래무지 같은 딸아이도 학교에 간 이른 아침,

어슬렁어슬렁 지느러미 흔들며 주방으로 헤엄쳐 나온

떡붕어 같은 나는

무얼 먹을까 느린 물비늘 비틀어 흔들며 돌다

우유에 후레이크 한 줌 타서 먹는다

거친 곡물이 어금니 사이를 통과하며 잘게 부서지는 동안

둥근 혀는 빗자루처럼 쉼 없이 제 몸을 쓸어

굵은 입자들을 어금니 사이로 연실 모아주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속에서 강력하게 국물만 걸러

목구멍으로 넘기는 혀, 양옆 빗살무늬들을 생각한다

간밤의 미세한 잡념이 숨 끝에만 닿아도

아침 한켠이 숨가빠오는데, 혀는

괜찮다 괜찮다며 빗살무늬 같은 몸을 재빨리 벌려

엉킨 통로를 열어준다, 수저를 놓고


전화기 너머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집 앞 횡단보도를 헤엄쳐 다니는 햇살 한 마리,

거대한 아가미로 행인들을 걸러먹고 있다.                                        

 

58년 안성 출생       

국립 한경대학교졸업 

2010 현대시학으로 등단(시 워낭소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