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다시 읽은 <데미안> - 박해성

heystar 2011. 7. 6. 15:25


 

다시 읽은 『데미안』

 

   

  청소년기에 읽은 책을 요즈음 다시 읽고 있다. 똑 같은 책에서 얻는 전혀 다른 느낌들이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나이테가 늘어갈수록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나도 살아온 시간만큼 성장한 걸까? 아님 기성품처럼 생각이 규격화된 걸까?  헷세의『데미안』에서 얻는 감동이 타인의 일기처럼 담담하다.

 

  중학교쯤에 읽었을 때는 경이롭기까지 해서 데미안의 ‘독심술’을 구사하려고 오랫동안 침묵하던 날도 있었다. 지구에 반신을 묻은 채 부화하려고 몸부림치는 새의 그림은 눈으로 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라는 구절에 도달하면 ‘어떻게 알을 깰 것인가?’ 고뇌하던 열여섯 살 말라깽이 소녀의 퀭한 눈빛이 선명해진다. 인간이 만든 신 앞에서 선과 악의 흑백논리로 세상을 마름질하던 어른들을 얼마나 당돌하게 비웃었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나의 아브락사스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직도 종교를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 중 어느 정도는 그때의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성장한 탓도 있다는 걸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꼈다.

 

  내면의 소리에 충실할 것, 십대의 나에게는 혁명적인 교훈이었다. 스스로 자기 내부의 확신에 도달하는 힘을 키우기 위하여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했으리라, 그러나 당시 나의 현실은 너무나 암담했다.

  싱클레어가 빛과 어둠 사이에서 고뇌할 나이에 나는 허기와 질병에 시달렸다. 가난은 타고난 운명- 운명을 받아들일 용기는커녕 자신을 지배하는 결핍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던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내면의 정신적 성장통은 배부른 투정이 아니었을까?

 

  “사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삶을 살고자 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다지도 어려운 것일까?”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한 줄 한 줄 의미를 되씹으며 읽었던 책을 하룻밤에 독파했다. 150여년의 시공을 넘어 좀 더 선명해지는 작자의 의도를 짚어가면서 헤세야말로 카인의 표식을 지닌 특별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나타나는 감정이 바로 ‘불안’이다”라는 글귀에 밑줄 긋는다.

 

 

 

『데미안』- 작품내용

 

 『데미안』은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에 헤세가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것으로써 2년 동안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전후의 허탈과 혼미에 빠져있던 독일인들 사이에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켜 무명작가인 헤르만 헤세를 일약 베를린의 신인 문학상인 폰타네 상을 수상하게 했다. (참고 - 세계문학대전집 24 - 삼성당)

 

  하나의 알 속에 존재하는 두 세계(빛과 어둠)와 그에 대한 상징적 요소를 시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인 자아탐구가 철학적 시각으로 전개된다.

 

  『데미안』의 초반부는 주인공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일인칭 형식으로 풀어 가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 서정적 묘사보다는 철학적 자아탐구 형식으로 기울어진다.

  즉 주인공 싱클레어는 전통적으로 훌륭한 가문에서 신앙과 지성, 재력을 갖춘 양친의 따스한 애정 속에 성장하는 ‘빛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에 대비되는 ‘어둠의 세계’는 가난하며 천대받는, 그래서 냉소적이고 악마적 요소를 지닌 하류층의 크래머가 등장한다. 이렇듯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는 ‘선과 악’의 반목으로 인식된다.

 

  크래머의 패거리와 어울리기 위해 남의 집 과일을 몰래 따먹었다는 엉뚱한 허풍으로 자신의 용기를 과시한 싱클레어는 그로 인해 실제 ‘어둠’을 체험하게 된다.

  즉, 고발하겠다는 공갈 협박에 식구들을 속이고 주인공은 잔돈푼을 훔쳐다 크로머에게 바치며 괴로운 나날을 이어간다. 공포심과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싱클레어는 자기가 속한 빛의 세계가 얼마나 안온하고 따듯한 행복이었나, 새삼 절감하게 된다.

 

  데미안이 나타나면서 싱클레어의 현실적 고통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독심술로 내면을 꿰뚫어보는 데미안에게 주눅이 든 주인공은 그를 우러러보면서도 두려워하는 한편 좋아하면서도 열등감으로 피하게 된다. 특히 놀라운 것은 카인과 아벨의 재해석이다. 카인에게서는 다른 사람과 다른 재기와 용기와 담력을 읽어내고 아벨에게서는 비굴함과 허약함을 읽어내는 데미안에게 공존하는 성스러움과 악마적인 것의 양면성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며 싱클레어는 내적으로 성숙한다.

 

  성과 속, 선과 악, 환희와 공포, 진실과 거짓, 남자와 여자 등 모든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혼돈 속에서 싱클레어는 청년기를 방황하다 꿈속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녀는 주인공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그로 인해 싱클레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방황과 번민에서 풀려난다. 이는 주인공 스스로의 자아 찾기에 성공한 것으로 해독할 수도 있겠다.

 

결국 그가 그린 그림 속 인물이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임을 알게 된 싱클레어는 겨우 찾아낸 이상적 사랑에 몰두한다. 반면 데미안과 에바부인은 모성적 신의 사랑으로 따듯하게 주인공을 포용한다. 진부한 사랑과 건강한 사랑의 은유일 것이다.

 

  아부락사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상징적인 신의 이름이다. 내면의 길을 찾아 방황하는 주인공이 데미안에게 그림을 보내면서 얻은 해답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간절히 희구하던 신은 아니었을까?

 

 

  에필로그는 1차 대전을 암시하는 전쟁이다. 이는 아마 필연적으로 하나의 알을 깨고 부화하려는 유럽의 고뇌를 그대로 묘사한 것 같다. 그 당시 이름 모를 전장에서 카인의 표지를 달고 죽어 간 용기 있는 사람들은 아브락사스 신에게로 날아갔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들이 떠난 자리 흐드러지게 신세계가 열렸다나…

 

  책을 덮기 전에 한 번 더 찾아 읽은 곳은 “용기와 개성을 지닌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몹시 겁나는 존재”라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카인의 이마에 악마의 표식이 있다고 꾸며 낸 이야기로 자신들이 느낀 공포에 대하여 앙갚음을 하려는 비겁한 겁쟁이들은 - 지금 내 주변에도 실재하고 있다. 일찍이 카인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얄팍한 속내를 간파한 작가의 혜안에 진심으로 갈채를 보낸다.

 

                                                                           - 박해성의 내멋대로 책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