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모따심으로의 접근 - 박해성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은 봄베이의 변호사 미르 바하두르 알리가 썼다' - 고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보르헤스의 작중인물인 미르 바하두르 알리는 인도인이고 그가 쓴 소설이라고 보르헤스가 내세우는『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을 평하는 사람들은 실존인물인 영국의 전기 작가 필립 게달라와 저명한 세실 로버츠다. 두 작가는 실존인물이나 그들이 바하두르의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작품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즉, 날조된 사실이다. 따라서 작가인 변호사 미르 바하두르 알리 역시 가상의 인물이다. 보르헤스는 이 가상의 인물을 위해 진지하게 주석을 달아 독자로 하여금 그가 마치 실존인물인 것처럼 착각하게 유도하고 있다.
이처럼 보르헤스의 소설에서는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허구인지 알 수 없게 뒤섞어 놓아 자칫하면 독자는 능청스런 보르헤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실재했던 작가들인 윌키 콜린스, 페리드 에딘 아타르, 체스터턴, 도로시 세이어스, 등 보르헤스를 통해 내가 알게 된 수많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그가 눈이 멀도록 도서관을 뒤져 찾아낸 세계의 종교들 그 교파들, 고전들, 생소한 지역이름 등등… 그의 방대한 독서는『보르헤스 사전』으로 엮어낼 만큼 백과사전적이다. 내막이 그러하니 나처럼 독서량이 하찮은 독자는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구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난제다. 하여 그의 의뭉스러운 소위 <환상적 리얼리즘>의 트릭에 눈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보르헤스의 소설로 돌아가서... 『알무타심에로의 접근』이라는 책이 잘 팔리자 가상 작자인 변호사는『알무타심이라고 불리는 사람과의 대화』또는「변형되는 거울들과의 유희」라는 부제가 달린 아류의 책들을 저명인사의 서문을 실어 유명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등 야망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킨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이다. 보르헤스의 천리안이 무섭다.
이 잘 팔리는 바하두르의 소설 속에서 이름 모를 주인공 (이름이 없다는 익명성은 누구라도 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은 사람의 율법을 어기고, 신의 계율을 어기고, 종교의 관습법을 어기고 살인과 간음을 자행하는 ‘법과대학생’이다. 법을 어기는 법대생이란 설정 역시 역설적이다. 이렇듯 보르헤스의 소설은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심장한 메타포를 내포하고 있지만 자칫 놓치기 쉽다. 또한 작중 인물이 변호사 바하두르인 것은 액자소설의 주인공인 법대생의 미래를 넌지시 보여주는 듯하다.
본의 아니게 힌두교도를 죽이고 방황하던 대학생은 온갖 음모와 모험을 겪으며 방황하다가 어떤 신비한 인식을 하게 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이 깨달음 자체인 어떤 사람이 있다.>(p,59) "깨달음 자체인 사람"을 찾으려는 알모따심으로의 접근 - ‘알모따심’이란 이름은 어원학적으로 ‘<피난처를 찾는 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p,62) 이는 알모따심 역시 그를 찾고 있는 대학생처럼 ‘방황하는 자’ 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 둘은 동일인물이라는 묵시적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은가.
‘대학생은 두어 차례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알모따심을 찾는다. 한사람의 목소리 --알모따심의 형용할 수 없는 목소리-- 가 들어오라고 응답한다. 대학생은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소설은 끝난다.’(p, 60) 라는 보르헤스의 작전은 액자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바쳐 찾기로 결심한” ‘알모따심’은 존재하는 어떤 실체일수도 있지만 허구일수도 있다는 암시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알모따심’은 수도승일수도 있지만 짐승일수도 있다. 꽃 일수도 있지만 바람 일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독자인 내가 도달한 ‘알모따심’은 ‘空’이라 할 수 있다. ‘空’은 그 형상이 있지 않으며 그 형상이 없지도 아니하다. 모습이 있지 않지도 않으며 없지 않지도 않으니 그 모습이 동시에 있고 없고 하지도 않다… 하였으니,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할 만하다.
즉 ‘알모따심에 대해 언급하는 유태계 흑인 코친은 알모따심의 피부색깔이 검다고 말한다. 한 기독교인은 그를 탑 위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빨간 옷의 한 라마승은 <내가 타순휠포의 수도장에서 모습을 떴고 경배했던 야크 소의 버터 같은 형상으로 그를 기억한다.’(p,61) 라는 대목에서는 알모따심 혹은 신으로 유추되는 동일한 한 존재의 형상이 절대적이 아니라 인간의 민족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리 묘사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이해방식은 신의 형상을 본 자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 그렇지 않다. 신앙은 인간을 지배하는 이념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렇다, ‘空’의 세계가 그러하듯 신은 없지만 있다. 하여 ‘신’이라는 글자에 '알모따심‘이라는 명사를 대체하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실은 책을 읽는 도중엔 대학생이 자신도 모르게 죽인/죽였다고 생각하는 힌두교도가 신이 아닐까… 넘겨짚기도 했는데… 친절한 각주를 보면 작중의 가공인물인 ‘미르 바하두르 알리’라는 이름 중 ‘알리’는 이슬람 신의 이름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액자소설은 신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주인공 법대학생이 액자소설의 작가이자 변호사인 바하두르의 과거라면 이름 모를 법대생의 이름은 ‘알리’가 된다. 따라서 알리와 알모따심이 동일인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 결국은 알모따심이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여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범법자인 대학생과 ‘개와 도마뱀들을 처먹는 자들,(p, 57)과 야심만만한 변호사와 함께 살고 있으니 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셈이 아닌가, 혹시 우리 모두가 신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 너무 확대해석하는 걸까, 지금 나 헷갈린다.
보르헤스는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가상 작가를 통해 언급하기 위하여 잘 짜인 각본대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즉, 호머의『율리시스』를 텍스트로 재구성한 조이스의『율리시스』를 본보기로 거론하며 '현재의 한 책이 옛날에 씌여진 어떤 책으로부터 유래함은 명예로운 사실이라는 건 납득할만한 일이다.’(p,62) 라는 긍정론을 피력한다.
또한 '바하두르의 소설이 파리드 우딘 아타르의 시집 『새들의 대화』와 가진 접촉은 그 책이 런던뿐만 아니라 심지어 알라하바드와 캘커타에서조차 상당히 신비스러운 격찬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임을 예견시키고 있다.’(p,63) 이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해 태어난 작품이 국경을 넘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낯설지 않게 환영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읽힌다.
보르헤스의 문학기법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야기가 멈추거나 처음 시작한 곳으로 국면을 되돌리는 등 황당하고 기만적이며 불길하고 혼란스럽다. 그렇다 해도 실재보다 힘이 센 허구를 통해 사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품세계는 늘 나를 주눅 들게 한다. 푸코나 들뢰즈처럼 보르헤스의 말귀를 잘 알아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보르헤스 앞에만 서면 나는 늘 헛다리를 짚거나 벽에 부딪혀 이마를 깨기도 한다. 엉뚱한 늙은이 - 툭하면 나 혼자 투덜대지만 쉽게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는 틀린 것 같다. ■
<박해성의 내멋대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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