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 수상 <훔쳐가는 노래> 외 -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 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 계간 『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 발표
제21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에 진은영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가 선정됐다.
진은영 시인은 “굉장히 문학적인 행운이라 생각한다. 소중한 문학적 행운을 힘 삼아 좋은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제 시는 누군가의 전범이 되는 종류의 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범이 되지 않는 문학의 소중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전범이 될 수는 없으나 존재해야 하는 특별한 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저의 소망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진은영 시인은 6일 "배우고, 훔치고 싶은 시를 쓰는 동료들과 함께 후보에 올라 내가 상을 받을 지 몰랐다"며 이같이 밝혔다. 시집 『훔쳐가는 노래』로 한국시의 미학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녀는 "이번 시집은 실패의 흔적으로 가득한 시집"이라며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자신 없는 것들로 시를 썼는데 이런 노력을 잘 봐준 것 같아 감사하다"고 전했다.
지난 200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한 이후 두권의 시집을 통해 낯선 화법에 실린 선명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독창적인 은유의 세계를 펼쳐 보이며 최근 우리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으로 떠오른 진은영 시인의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는 『우리는 매일매일』 이후, 5년 만에 펴낸 시집으로 현실세계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 사회학적 상상력과 시적 정치성이 어우러진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선보인다.
진은영 시인은 1970년 대전에서 출생하여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가 있다.
시상식은 12월3일 오후 6시30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다.
[출처]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