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만복사 저포기 - 송재학

heystar 2013. 10. 13. 17:21

                                    만복사 저포기 

 

                                                                                송재학

 

 

  異史氏*가 말한다, 모년모월 경북 영천 송생은 만복사 스님과 주사위판을 벌렸는데 노름이야 도깨비 살림이라지만 스님과 송생은 각기 종잣돈과 뒷돈을 앞장세워 시비를 가렸는데, 과연 스님을 아슬하게 이겨 목숨을 부지한 송아무개는 그날 억지로 경을 한 권 받아 유심히 살폈으니, 낡고 희미하지만 문장이 맑아 인간세상의 책이 아닌 듯 했다 두근거리며 진동걸음으로 경을 숨겨 돌아온 서생, 수백 번 읽고 외우고 찢고 태우며 공중에서 허궁의 소리가 들린 후에야 고향 땅 아무개산 츠렁바위 인근에 헛묘를 썼으니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심란했더라

  하 수상한 세월 지나 누군가 만복지보를 찾아 봉분을 파헤치면 책은 먼지처럼 바스라져도 보물은 고스란히 있을지니, 파묘자는 먼저 황장목관에서 깨끗하면서도 무늬 없는 상자를 볼 수 있을 터, 허나 상자를 열어보면 다시 상자이다 또 다시 열어보면 고대로 처음 본 민무늬이니 인내심으로 다시 열어볼 일이다 또 다시 상자와 상자라면 잠깐, 찬서리 홍낭자 신세인 파묘자는 화증이 솟아도 알아야겠지, 송아무개의 일생 또한 텅 빈 것들의 악연이었다고, 그의 헛묘와 생애를 가득 채운 건 의심투성이였다고, 파묘자는 송아무개가 그 경을 수 백 번 고쳐 읽고 골몰했지만 의심을 의문으로만 바꾸었다는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마 만복사 저포기 이후 ‘宋生傳’의 이모저모도 그러했을거라, 문득 여기까지 궁리하다 다시 곰곰 앞뒤로 셈해보니 쥐뿔도 남기지 않았던 선문답 같은 송아무개가 분하여 파묘자는 기어이 서생의 주검을 찾아 해골의 눈알이라도 샅샅이 들여다보고 싶을 터, 경북 영천 낙백서생 송아무개가 읽은 경의 마지막 쪽은 죽은 뒤에도 눈 부릅뜨는 개안술에 대한 너덜너덜한 방법론이었겠다

 

*포송령의 『요재지이』의 화자 

 
                                                                                        - 웹진 『시인광장』2009년 가을호 발표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 경북대학 치과대 졸업.

- 1986년 《세계의 문학》등단. 

-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등.

- 수상; 김달진문학상,  대구문학상 수상. 제25회 소월시문학상, 제5회 이상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