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자라 - 문성해

heystar 2013. 9. 16. 12:06

      자라 

 

              문 성 해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 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 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나오는

  꼽추 여자를,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 시집 『자라』(창작과비평, 2005) 중에서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 1998년《매일신문》,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집; 『자라』(창작과비평, 2005)와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2007),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