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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 12회 노작문학상수상작 <대부분의 그는> - 이수명

heystar 2012. 10. 9. 16:51

제12회 노작문학상 수상자에 이수명 시인

 

—수상작 「대부분의 그는」등 5편

 

  노작문학상운영위원회(정진규, 최정례, 이문재, 이덕규, 유성호)가 주관하고 화성시가 후원하는 제12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이수명 시인이 선정됐다.

 

  이수명 시인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4년 계간 《작가세계》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등 다수가 있으며,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시론집 『횡단』, 번역서 『낭만주의』 등이 있다.

 

  이번 노작문학상 수상작은 「대부분의 그는」등 5편으로 우리 시의 폭을 넓게 끌어갈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수명 시인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시세계를 오랜 기간 구축해 왔으며, 특히 최근 들어 그 시적 행보에 더욱 긴장감이 느껴진다.

 

한편, 노작문학상은 일제강점기를 치열하게 건너며, 동인지 〈白潮(백조)〉를 창간하는 등 낭만주의 시를 주도했던 시인이자, 극단 〈토월회〉를 이끌며 신극운동에 참여했던 예술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1900-1947)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2001년부터 그 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에게 수여되고 있다.

 

  제1회 안도현 시인을 시작으로, 이후 이면우, 문인수, 문태준, 김경미, 김신용, 이문재, 이영광, 김행숙, 김소연, 심보선 시인이 수상한바 있다.  상금은 기존 1천만원에서 인상된 1천5백만원으로 시상식은 10월 27일(토) 제1회 <노작문학제> 기간 중 노작문학관(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 노작근린공원 내 위치)에서 열린다. 노작문학관은 올해 처음 제1회 <노작문학제>를 개최할 계획이다.

 

                                                                                                              [출처] 2012. 07. 24  YBC연합방송 / [화성] 이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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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그는

 

                                                       이 수 명

 

 

대부분의 그는 음영이 없다. 당분간 그를 세워 두는 게 좋겠다. 그를 거리에 한 줄로 늘어뜨려 놓는 게 좋겠다.

 

대부분의 그는 다른 사람에게 밀려들어간다. 들어가서 휘어진다. 대부분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제 목을 자른다. 그는 우두커니 바닥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고 대부분의 그는 자신을 잊어버린다. 잊어버리려고 손을 들고 있다. 이제 그는 나을 것이다. 손이 굳어질 것이다.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그는 한꺼번에 발견된다.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입천장을 두드려 본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한데 뒤얽힌다.

 

대부분의 이동하는 그는 이동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동하는 그는 이동이 식어 있다. 그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인가. 대부분의 그는 대부분의 그에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 부서진 한복판에서

 

잊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려고 그는 서 있다.

                                                                                                                    -《서정시학》2011년 겨울호,

                                                                                                                    - 《현대시학》2012년 2월호 재수록.

 

내가 읽은 나의 시

 

                        뒤통수가 떨어져 나간 듯한 이 사람 / 이수명

 

 

  시를 쓸 때, 나는 우선 무언가를 보려고 한다.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일 수도 있고, 장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사건일 수도 있다. 흔히 생각하기에 보는 것은 아는 것이라지만, 백 번 듣느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나에게는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비슷하기는커녕 차라리 대립적인 것이어서, 나는 보는 순간 <봄>에 미혹되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봄으로써 알지 못하게 되고 알지 못함으로써, 빠져드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보게 되고 흐려지는 어떤 막무가내의 절연 지대랄까, 이러한 것이 언제부턴가 내겐 있어 왔는데, 이것이 바로 나의 시로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나의 이 절연 지대로 들어설 어떤 광경에 직면하는 것, 그 세계의 창출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세계를 보아야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아마도 그림이란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개념예술과 같이 우선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많이 있지만, 이 경우에도 사실은 오브제의 제압이라는 심적 부담을 자양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물질성, 즉 미술의 가시성은 본래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화가들은 평생 물방울을 탐구하거나, 사과, 여인을 그려 대고, 기타를 보기 위해 기타의 형체를 부수기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그림에서도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는 점인데, 화가들이 사물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언제나 이해의 실패로 귀결되는 듯이 내게는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즐거움은 기꺼이 자신의 실패에 투항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사물을 전개하는 것이 사물에 대한 이해를 중지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각양의 사조들로 납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다양한 제스처는 사물을 보았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볼 수 없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제스처들로 인해 그림이 보여주는 무언가는 단지 <무엇으로 제시>되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예술의 본질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하게 예술의 생명이라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와 같은 순간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자각이 일어나는 순간 동시에 비자각적으로 전환되는 지대 말이다. 생각해보면 예술은 실상, 자각을 통해 비자각을 회복시키는 것인 까닭이다. 그것은 자각의 타파를 향해 자각하는 허망한 소용돌이에 지나지 않는다.

 

(시 '대부분의 그는' 전문 인용을 생략함.)

 

  나는 지금 어떤 사람에 대해 쓰고 싶다. 그런데, 내가 쓰려는 사람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는 누구인가? 어떻게 발생했는가? 질문하기에 앞서 그 사람을 눈앞에 떠올려 본다.

  그의 몸짓, 행위를. 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모든 움직임은 기묘한 현실감을 선언할 뿐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 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제 목을 자르>는지, 왜 <그는 한꺼번에 발견되>는지, 왜 <그는 이동이 식어 있>는지, 왜 <그는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는 서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나는 두리번거린다. 이 두리번거림이 시를 쓰게 만든 동력이다. 만약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몰이해 속에서만 존재는 움직인다.

 

  나는 내가 어떤 시를 쓰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 대해 묘사한 것 같은데, 그에 대해 그려 나가기보다는 결국 그의 식별 불가능함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세계로부터, 삶으로부터, 다른 이들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덩어리, 뭉치, 근소치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없다. 확정적인 윤곽 안에서 그를 구원할 수가 없다. 그는 확정적인 주체가 아니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라기보다는 언제나 <대부분의 그>이다.

 

  이 <대부분의 그>는 세계의 과잉의 흔적으로 보인다. 세계가 그를 덮치고 있으며, 그를 이루는 주요 성분인 것이다. 그라는 고유한 단자는 없고, 그는 대부분으로만 추정된 미결의 존재이다. 대부분이라는 가설은, 그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에도 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공표이다. 그는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그는 경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그는 인간인가, 단지 뭉쳐 있는 인간군인가, 그는 세계인가, 그는 과거인가, 현재인가, 오지 않는 미래인가. 시간을 까마득하게 거슬러 올라가면, 또 시간이 까마득하게 지나가 버리면, 나는 나의 이 두터운 미혹과 결합할 것이다. 나는 나이고 그이고 우리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나를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의 추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라는 존재의 피부에 계속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다시 그가 서 있다. 그가 움직인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 <손을 들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그는 나의 이 모름에 적절하게 부합한다. 그는 늘 잊어버리는 존재이며, 무엇을 잊어버렸는지조차 잊어버리는 존재이다. 그래서 <잊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려고> 서 있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이 맞나 잠시 생각해본다.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길을 잃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나는 이렇게 뒤통수가 떨어져 나간 듯한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끝까지 알 수 없게 되는, 이 아무것도 자각할 수 없는 존재를.

                                                                                                                    [출처]—《현대시학》 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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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서울 출생.

- 서울대학 국문과 졸업.

-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 등단.

-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 수상; 2001년 박인환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