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포엠

참치통조림

heystar 2012. 7. 3. 15:12

 

                                                                                                                                  그림/박해성

     참치통조림

                詩/박 해 성

 

진보나 보수보다 깡통을 신뢰한 나는 난바다를 유영하던 등 푸른 어류였지

바코드 작살에 꽂혀 이냥 속내 들키고

 

불쑥 꽃을 내밀던 그 녀석, 등 돌렸어

뚜껑을 따는 순간 내 가난이 쏟아지자

단번에 영양가 없다, 걷어차며 투덜투덜

 

찌그러진 옆구리가 무시로 욱신거려

잔별 다 이울도록 울었덩가, 웃었던가?

바람의 이빨자국에 내면부터 녹이 슬던

 

한 토막 환상통이 욱신대는 늦저녁에 비릿한 애증처럼 들끓는 김치찌개

쓰린 속 풀어지려나, 눈물 콧물 얼큰하다

 

-출처; 박해성시집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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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서 불쑥 장미 한 송이를 내밀던 사람이 있었다. 그래, 첫사랑이라 치자. 그는 진보와 보수를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자본에 길들여지는 장삼이사의 현실을 가슴 아파했었다.

 

   참치 캔을 따서 김치찌개에 쏟아 넣는 순간, 난데없이 왜 그가 생각났을까?

 

   세상 무서울 게 없던 스무 살 무렵이던가, 웃을 때면 유난히 고른 치열이 반짝이던 그가 무작정 좋았다. 그의 박식함은 독서량이 빈약했던 나를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가 헤겔과 마르크스의 형이상학을 조근조근 풀어 낼 때면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이나 시에 대하여 섣불리 열을 올렸다. 갑론을박은 없었다. 참치 캔에서 바코드를 읽는 스캐너처럼 그는 내가 빈 깡통이라는 걸 이미 다 읽고 난 후였으므로.

 

   우리는 말다툼 한 번 없이 서서히 멀어졌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그 이유는 둘 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나는 그 즈음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렸던 때였다. 조금은 철이 들었을까? 그가 욕망을 진공포장한 통조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바람에 실려 오는 그의 소문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던 여자아이는 어느덧 겉과 속이 다른 통조림같은 자본주의에 착하게도 길들여진 속물 - 헤겔보다 리챠드 기어를 좋아하고 마르크스보다 박진영을 좋아한다.

 

   읽을 수 없이 검정 비닐봉투에 들어있는 냄새나는 정치나 책갈피에 은둔하는 늙은 철학을 탐색하기보다는 원터치로 가볍게 열리는 값싼 친절을 선호하게 되었다.

 

   하여 단번에 바닥을 드러내는 충만한 극빈이며 아무렇게나 걷어차 버려도 좋은 저 깡통이 눈물겹도록 만만해서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