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자화상 - 서정주

heystar 2012. 2. 18. 17:42

        자화상(自畵像)
 

 

                           서 정 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월간 『시건설』 7호, 1939년 10월호 발표

 

1915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2000년 사망.

- 중앙고보와 중앙 불교학원에서 수학.

- 193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

- 시집; 『화사집(花蛇集)』(1941)『귀촉도(歸蜀途)』(1948),『신라초(新羅抄)』(1961),『동천(冬天)』(1969),

          『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산시』(1991)등 다수의 시집과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을 간행.

- 조선청년문학가협회·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동국대 교수 역임.

- 수상; 5·16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출처]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