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

2012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heystar 2012. 1. 2. 19:49

        물푸레 동면기

 

                          이 여 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이여원(필명) ◆약력 1957년 진주 출생 주소:서울 양천구 신정7동 직업:주부

 

 

[심사평] 치밀한 묘사력·견인주의적 시각 돋보여

  대개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전적으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은 꽃의 개화(開花)도 후에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읽히지 않는 시라고 하여 다 난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가 난해하기는 해도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상관관계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그에 따른 보편성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이다.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논의된 것은 이재흔의 '크라이오닉스', 이해존의 '유목의 방', 이여원의 '물푸레 동면기'와 '난청' 등 4편이었다. '크라이오닉스'는 발상이 참신하지만 언어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한 은유들이 더러 눈에 띈다. '유목의 방'은 말미의 비약이 아쉽다. 이 시는 고시원이라는 막막한 삶의 공간을 대초원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말미의 ‘고시원 휴게실’과 앞에서 펼쳐낸 ‘몽골 사내’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시는 성립할 수 없다지만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이여원의 두 작품에서 하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이견 없이 합의했다. '물푸레 동면기'는 얼음물에 떠 있는 겨울의 물푸레나무를 치밀하게 묘사해가면서 서정시의 깊은 완성도를 보였다. 또한 '난청'은 사물을 포착하는 감성이 신선하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각각 완성도와 참신성이라는 양측면에서 잘 빚어냈다. 그의 두 작품 중에서 '물푸레 동면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포리즘의 도움 없이 세밀하고 실제적인 묘사만으로 새롭게 열어 보이는 서정의 창출이 읽을수록 착착 감기감칠맛과 더불어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음물 속에서 동면하는 물푸레에서 견인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라는 성숙한 견자의 시각을 이끌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서정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도광의`박형준)  

 

예심: 송종규`장하빈

본심: 도광의`박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