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킬리만자로의 시 - 허만하

heystar 2011. 11. 21. 15:43

                                  킬리만자로의 시

 

                                                                      허 만 하

  


  1.

  눈에 덮인 킬리만자로 서쪽 산정에

  한 마리 표범이 얼어 죽어 있다

  왜 그 높이까지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표범이 그 곳에 있다


  2.

  그가 찾았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그가 찾았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5900 미터의 외로움

  5900 미터의 배고픔

  눈부신 킬리만자로의 절망

  최후의 노을은 격렬했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쌓인 눈이

  그대로 얼어붙은

  순결한 시

  아프리카 최고봉 산맥을 넘는 폭설과 함께

  50년의 상상은 눈 속에 묻힌다


  3.

  시는 순결한 얼음의 질서다

  오지가 단죄하는 문명의 여름

  오염을 저항하는 치열한 눈송이의 투신

  시는 정신의 겨울이다

  시는 만년설처럼 죽음 뒤에 솟구친다


  4.

  목적의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가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허약한 시

  여름 아침

  풀잎 끝에 맺히는

  한 방울 이슬처럼

  허약한 시


  시는 반동의 집단에 속한다

  시는 역사적 필연을 반역한다

  시는 뉴튼의 섬세한 손을 사랑한다

  시는 장작불에 팔을 넣는

  갈릴레이의 형벌이다

  시는 블랑쇼처럼 무한히 방황한다

  시는 베케트처럼 끊임없이 기다린다

  지리산 자락에서 검은 아편 덩이를 마신

  시는 선비의 결단이다

  다이아몬드 나이프로 그은 동맥의 피다

  시는 드디어 쫓겨나야 한다

  도시국가 성문 밖

  짐승 털을 걸치고 꿀을 먹고 사는

  이방인의 황량한 광야로

  추방되어야 한다


  5.

  인간의 눈이 교활하게 반짝이는 때

  표범의 눈은 야생의 순수 그 자체다

  표범은 낯익은 풍경에 동화하지 않는다

  표범의 질주는 육감적이다

  은하수 물길에 목을 축이려

  무너지는 너들을 혼자서 건넌 목마름

  지도가 쓸모없는 길을

  다부진 발목으로 추락을 저항하며

  낯익은 풀밭에서 사슴을 쫓듯

  미지의 풍경을 찾아 나선 최후의 야성


  시인이 세계의 고독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햇빛과 바람이 함께 얼어붙는

  킬리만자로 산정에서

  한 마리 표범은 얼어 죽고 있었다


  6.

  눈에 덮인 킬리만자로 산정에

  한 마리 표범이 얼어 죽어 있다

  왜 그 높이 까지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표범이 그 곳에 있다


                                                      월간 『현대시학』 2008년 12월호 발표 

1932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졸업(1957, 병리학 의학박사).

1957년『문학예술』지에 詩 추천으로 등단.

시집;『해조海藻』(1969) 출간을 시작으로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2003) 등.

산문집;『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2000), 『청마풍경靑馬風景』(2001),『길과 풍경과 시』(2002).

수상; 박용래 문학상(1999년), 한국시협상(2000년), 이산문학상(2003년) 청마문학상(2004) 등.

부산 고신대 의대 교수 정년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