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스펙트럼-김혜천

heystar 2023. 2. 8. 12:50

                        스팩트럼

                        ㅡ 유리프리즘으로 본 문장

                                             김혜천

  빨강

먼 행성에서 도착한 생명은 모두 붉다 후박나무 새 움이

그렇고 고고성을 지르며 창끝을 밀어 올리는 차나무 아

그렇다 탯줄을 감고 밀려 나오는 어린 것 어미와 아우의

탯줄을 가르던 어느 해 그날처럼 이른 봄 나는 피울음을 두

손으로 받는 산파가 된다

  주황

주홍글씨를 새기지 않고 사막을 건널 수 있는 자 손 들라

그러므로 무수한 손가락은 마땅히 자기를 가리켜야 하리라

삶은 원죄를 천형처럼 물려받은 내림굿 노을이 산을 넘을

때 한판 춤추고 돌아가는 씻김굿

  노랑

골짝엔 아직 눈 푸른데 복수초 조그만 부리로 대지의 균

열을 낸다 빛을 향해 실눈을 뜨고 내가 걸어가야 할 세상

은 얼마나 넓은가 결빙 위에 노랑 포화가 쩌렁쩌렁 산을

흔든다

  초록

한 알의 씨앗이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룬다 한 방울 이슬

과 한 줄기 바람 빛의 광란이 나를 키웠다 뇌우가 칠 때마

다 충돌로 만들어지는 주름이 나이테가 되었다 무늬마다

새긴 삶의 노래여 행간마다 뿜어낼 초록 문장이여

  파랑

바다에서 하늘을 하늘에서 바다를 본다 발붙일 곳 없이

서성거릴 때 누가 혼을 교란하는지 불안이 절정에 다다를

때 파랑이 불 때 그 길이 시님 오시는 길임을 뒤늦게 알

았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리두기를 해야 했던 시간

이 지나고 이제 눈부신 청색 스카프를 휘날리며 쪽에서

염료를 구하는 노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남색

경면주사를 개어 사경 하는 손으로 탑을 세운다 보주

寶珠는 아직 올리지 못하였으나 정으로 각을 새기듯 비원

을 새겨 한 층 또 한 층 쌓아 올리는 남색 비단에 구층석탑

  보라

바다 달팽이를 으깨어 분비물을 노출한 다음 거기서 나

오는 액체를 받아 양털을 태운 재나 오줌을 섞어 열흘 동

안 발효시켜 염료를 구해요 처음은 무색이지만 공가와 접

촉하면 보라가 되요 보라는

  기다림의 색

  사순절 제단의 색

  클레오파트라의 색

  빨주노초파남보의 마지막 보루

우수가 깃든 회색 도시를 걷는 동안에도 끝끝내 놓지

않았어요 한바탕 소낙비 긋고 저 멀리 둥근 꽃 그곳은 내

가 돌아가야 할 본향

  다시 백색광으로

빨강을 입으면 보수라 하고 주황을 입으면 중도라 한다

노랑을 입으면 소수라 하고 파랑을 입으면 진보라 한다

빨주노초파남보는 각각이 아니고 결국은 불이不二인데

가르고 찢는다 그러면 초록을 입자 따듯한 남색 패딩을

입자 모여서 피는 보라색 수국이 되자 무지개 그의 시원

은 물 모두 섞여 하나 되는 물 아닌가

출처; 『문학비평』 2022년 12월(31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