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그리고 창밖엔 비

heystar 2022. 9. 28. 01:14

                      그리고 창밖엔 비

 

                                                    박해성

 

변심한 애인을 만나 이별주 한잔했지 눈 뜨니 대낮, 하릴없이 죽은 이들을

찾아 도서관에 들렀다가 보르헤스를 만났지 그는 악명 높은 불한당들과

힘겹게 드잡이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시큰둥, 책장만 넘기다가 쳐들어오는

졸음에 잠시 방심한 사이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절반쯤 눈을 뜨니 검은 가죽점퍼가 히죽

웃고 있었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피해 나는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섰지

밖에는 느닷없는 먹장구름이 태양을 삼키는 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밀롱가가 돌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돌풍에 쫓기듯이 한참을 내달린 후에야 히히힝 앞발을 들고 말이 멈췄어,

어느새 어두워진 숲에서는 짐승들 울음소리가 채찍처럼 살갗을 파고드는데

멀리서 불빛이 깜빡였지 망설일 겨를도 없이 나는 그 집 문을 힘껏 두드렸어

도와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여는 한 남자, 뼈만 남은 하얀 손가락 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 뚝…

 

이 대목에서 대책 없이 냅다 뛰어들어 차바퀴에 말려드는 고양이를 보고

말았어 납작해진, 그래서 가벼운 영혼을 품에 안은 신의 긴 머플러가 휘날렸지

펄럭이던 그것이 그만 내 목을 친친 휘감았어 그만해, 이건 당신 실수란 말이야

죽어라 발버둥 칠수록 숨이 컥컥 막히는데

 

“따듯한 커피예요” 앳된 생머리가 속삭이며 종이컵을 내밀었어

“가위눌리시는 것 같아서요”

 

 

- 출처; 『스토리문학』 2022, 하반기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