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시
파이
heystar
2021. 1. 18. 21:51
파이
박해성
읽던 신문을 가슴에 덮고 설핏 잠에 빠집니다
38.5도 신열을 딛고 움트는 떡잎,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묵찌빠, 적막이 실핏줄처럼 뿌리를 내립니다
사회면 비명을 씹는 염소인양 지상의 나날들을
산채로 씹어 먹는 잡식성 몸살은 오, 어느새
뇌수를 뚫고 잔가지가 무성합니다
무성한 뿔을 인 사슴이 겅중겅중 뛰어다닙니다
천방지축 달리다가 달리의 시계를 밟았나요, 시간은
안녕하십니까, 박살 난 유리에 천둥번개가 스칩니까
소름처럼 파릇파릇 잡초가 돋아납니까
백지 위에 고삐를 풀어놓은 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황제에게 꼬리치는 것, 뱀피구두를 신은 것, 훈련된 것,
다족류, 발광하는 것들, 말할 수 없는 것, 방금 막
신을 버린 것, 들여다보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것들,
백과사전에도 없는 것, 토마스 핀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거북이족, 천둥벌거숭이, 데스페라도 기타* 등등
머리통이 좀 가벼워졌습니까, 02시 49분이 착각착각
분해된 나를 조립합니다 3.14159… 가슴 한 조각을
아직 찾아내지 못해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만
* 보르헤스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패러디.
-출처; 박해성 시집『우주로 가는 포차』 2020,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