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2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최초의 충돌
김민식
나는 화면 너머의 테니스 경기를 본다
테니스 라켓이 공을 치는 순간
무수한 공중이 한꺼번에 태어난다
고래의 힘줄
산양의 창자
얇게 저며진 살점으로 직공은
라켓을 짠다
종선과 횡선이 지나간 사이에
태어나는 눈
공중에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노동이었다
천사를 체로 걸러낼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축과 축의 직교 속에서 성령은 좌표를 얻었다
의심 속에서
의심도 없이
체의 촘촘한 눈을 세는 귀신의 눈은 비어 있다
눈알만 파먹힌 생선들이
부둣가에 쌓여 있다
백경白鯨의 투명한 수정체
멸종된 거대 수각류의 담석
전체를 상상하면 그것들은 차라리 허공이었다
한국의 산에는 호랑이 모양 구멍이 반드시 하나씩 있으며
돌탑 위에 둥근 돌을 하나 올려도
산이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었고
무수한 왕의 안구가 뽑혀나가도
지구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믿음 속에서
믿음도 없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킬 혁명이 필요했다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빛나는 돌이 불과 물과 함께 떨어졌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생겼다
외계에서 날아온 돌은 지구를 확실히 무겁게 만든다
그것은 종종 과학의 영역이었다
“마음 속에 천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서 천 개의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운석을 발견한 아이가 남긴 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검은 돌은
검은 신전의 기둥이 되었다
운석이 떨어진 자리엔, 빛과 유리와 불과 물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다만 우주의 조각을 만져보고자 하는 순례자들의
계획 속에서
계획도 없이
푸른 언덕에 모여 유성우를 구경하는 사람들
얼굴들이 깊게 파인 구멍 같다
나뭇가지에 걸린 셔틀콕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만 같다
너, 라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아무도 귀엽거나 밉지 않았고
아나운서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가 풍경을 화소로 만들기 직전
나는 주머니에서 빛나는 하얀 공을 꺼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구기종목의 공인구였다
김민식
1994년 인천 출생, 수원 거주.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졸업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전공 석사 과정 휴학 중
[시 당선소감- 김민식] -스스로의 시선 특권화 않고 계속 행동하기 위해 시 쓸 것
어제는 눈이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눈밭을 걸었습니다. 화단에 쌓인 눈에 나무막대기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무척 즐거웠습니다. 눈이 다시 쌓이거나 녹아버려도 개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귀갓길에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차가운 눈뭉치가 양초처럼 느껴졌습니다. 거기에 작은 불을 붙인 채 밤을 지새웠습니다.
개별자로서의 작가가 아닌 무수히 많은 저자를 지닌 텍스트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밭에 서 있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뒤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합니다. 스스로의 시선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계속 응시하고 행동하기 위해 시를 쓰겠습니다.
엄마, 아빠, 누나. 고맙고 사랑해. 나보다 먼저 태어난 당신들을 늘 믿고 의지해요. 우리 행복하자. 사랑하는 할머니. 외할머니. 친척분들. 더 자주 뵈러 갈게요. 병원에 계신 이모부. 쾌차하시길 바라요.
나의 제1독자 성현아. 네가 있어서 시를 계속 쓸 수 있었어. 승진, 예찬. 너희와 친구일 수 있어서 기뻐. 자연, 민주, 정민, 승훈 선배, 형주님, 윤화님. 함께 시를 읽고 쓰는 순간들이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지민이형. 늘 나를 이끌어 줘서 고마워. 종환아. 너와 친구가 된 건 큰 축복이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세미님. 화단에 쌓인 눈 위에 적어둔 약속 절대 잊지 않을게. 영원히 사랑해.
■김민식 ▲1994년 인천 출생, 수원 거주.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졸업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전공 석사 과정 휴학 중
[출처] 202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김민식의 <최초의 충돌>|작성자 박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