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밤의 주유소

heystar 2020. 9. 11. 12:06

       밤의 주유소

 

                      채호기

 

 

길은 어둠으로부터 나와 어둠으로 사라진다.

충혈된 눈처럼 불 밝힌 주유소

어둠 속에 꽃처럼 피어있다.

길 위의 인생,

심장에 휘발유를 주유하는 곳.

발작처럼 명멸하는 빛 아래

텅 빈 직선 도로 같은 인생은

전모가 드러났다 사라지는 절망 같은 것.

스쳐 지나고 마는 희망 같은 것.

그리고 이제 시한부처럼 남은 건

어둠 속으로

눈뜬 채 적막을 불러들이는 주유소.

적막의 도로, 적막의 잡초

적막의 나무, 적막의 간판

적막의 네온, 적막의 주유대

그리고......

그리고 절망의 웅크린 그림자들.

다시는 올 것 같지 않은 여명과 강인한

희망 같지도 않은, 그러나......

지하 저장탱크의 기름처럼 매복한 희망들. 

 

출처; 《문학사상》1996년 11월호에서

 

시집; 《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손가락이 뜨겁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