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시

202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heystar 2020. 1. 3. 15:23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심사평] 함께 보내온 시편들이 일정하게 고른 높이를 보여주었고, 또 시 창작의 연륜이 느껴졌다. 폐사지에서는 허공에서 독경의 소리를 살려내고, 떨어진 낙엽에서 풍경의 소리를 복원하면서 절이 사라진 공간에 다시 절을 짓는, 멋진 정신의 노동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또한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라고 말해 모든 생명 존재 그 자체에 법성이 깃들어져 있다고 바라보는 대목과 있고 없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담대한 상상력은 당선작으로서의 풍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불교시의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