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영옥 - 이경림

heystar 2018. 10. 9. 18:42

 

     영옥

 

                        이경림

 

 

영옥이 도착한다 한권의 책으로

한 쪽의 표지로 몇 쪽의 갈피로, 옆인 듯 앞인 듯

획 돌아보는 듯 희미하게 웃는 듯

 

볼이 통통한 영옥 눈이 매혹적인 영옥 머리칼이 칠흑인 영옥

배경은 검은 숲, 회백색의 개울, 그 건너 뽀얀 몽돌 밭

 

그러나 영옥은 어디 갔나?

 

갈피 속의 영옥은 잠깐의 쿠바, 어느날의 광화문, 막 지나가는 연신내

부산, 대구, 비 추적대는 날의 왕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은 의자,

어색한 술자리, 시 그 무엇보다

깊은 不治

 

영옥은 무엇인가?

 

맨발로 구만리 심해를 헤매는 눈먼 물고기?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조약돌?

그 파문에 잠시 저희끼리 몸 비비는 물풀?

 

영옥은 도착한다 지금 막 없는 순환열차를 타고 없는 역에 슬쩍 내려

장검처럼 번쩍이는 햇살에 아득히 미간을 찡그리고 있을 영옥은

 

일면식도 없는 아침처럼

누군가 흘리고 간 손수건처럼

 

나인 듯 너인 듯 그인 듯 그것인 듯 그 무엇인 듯 그 모든 것인 듯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그러나 그 무엇인 듯

 

키가 삼천척은 되는 저녁인 듯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 착 · 한 · 다. 여기저기서

없는 영옥들이 늙은 아카시아나무 우듬지를 흔들며

아아아 아아아

 

말하기 시작할때

 

* 고 배영옥 시인의 명복을 빌며

 

                   출처 - 월간 『시인동네』 2018, 10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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