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시조작품의 감상및 해설 - 박해성

heystar 2011. 5. 23. 00:19

                   시조 작품감상 및 해설

 

                                                         박해성

 

  고려말, 유학자들에 의해 형성, 발달된 시조는 우리고유의 문학형태로서 3장 6구 12절의 정형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조의 음수율은 절대 불변하는 고정적인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 자체의 성질에서 오는 신축성이 어느 정도 허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종장은 음수율의 규제를 받아 제1구는 3음절로 고정되며, 제2구는 반드시 5음절 이상 8음절 이하이어야 한다.

 

  이 같은 종장의 제약은 시조형태의 整型과 아울러 평면성을 탈피하는 시적 생동감을 깃들게 한다. 이렇듯 정형시이면서도 비정형인 듯하고 비정형이면서도 정형인 시조는 지금까지 질긴 생명력을 가진 귀중한 전통문화로 계승되어 전국적으로 시조인구가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수많은 동호인 모임이 있다. 이에  좀더 깊은 시조문학의 경지를 이해하기 위해 시조작품을 나름대로 감상하고 미숙하나마 해설해보고자 시도한다. 선정작품의 기준은 무작위임을 밝혀둔다.

1. <빨래를 하며> 이승은 作

후줄근한 어제를 벗어 수돗물에 담궈 놓고
더도 덜도 아닌 우리 삶의 무게
애증의 거품을 풀어 헹궈내고 있다.

헹굴수록 허기지는 얼굴들이 일렁이고
그리움의 체적만큼 밀리는 잔물결에
씻어서 환한 시간이 말갛게 뜨고 있다.

▶ 수선을 피우며 서둘러 나선 아침, 길 위에서 흰 국화로 덮인 장례 행렬을 만났다. 항상 무심히 다니던 길인데도 내 옆으로 마주 지나가는 검은 리본의 자동차 행렬을 보면서 새삼스레 낯선 거리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안에 누워있는 사람도 한때는 나처럼 서두르며 세상을 질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떠나는 지금, 몇 송이 흰 국화만이 그의 죽음을 알려줄 뿐 그와 함께 달리던 세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후줄근한 어제를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우리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있는 때묻은 옷들을 "애증의 거품을 풀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헹구며 스트레스를 풀리라. 그 빨래 속에서 무언가를 열망하는 들뜬 발걸음의 지친 "얼굴들이 일렁이고"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안쓰러움이 "그리움의 체적만큼" 내 안에 잔잔히 물결친다.  그러나 내일은 "씻어서 환한 시간이 말갛게" 세수하고 그대를 맞으리라........

  넘치지 않는 수식어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솜씨도 탄탄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삶의 깊이를 통찰하는 작가의 시적 안목이 놀랍다. 특히, 제 1수 종장의 "애증의 거품을 풀어 헹궈내"는 같은 은유적 표현은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제 1수의 중장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유행가 가사 같은 느낌이 들어 별로 신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보면서 -아, 이렇게도 세상을 만나는구나 - 새삼 시인의 심미안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2. <분이네 살구나무> 정완영 作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은 이 시에 나오는 풍경을 쉽게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절에 우리네 농촌에서는 힘겹게 춘궁기를 넘기던 "분이네" 같은 집들이 많았다. 봄이면 꽃들은 왜 그리도 만발하던지... 어디 살구나무뿐이던가, 들에는 민들레가 흐드러지고 동산에 오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고 무덤 가에는 할미꽃 천지였다. 복숭아꽃은 연홍의 바다로 펼쳐져서 넘실대는 보리밭과 색동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황홀한 한 폭의 그림인지를! 그저 허기를 달랠 봄나물을 뜯으러 봄바람 속에 물 바랜 다홍치마자락을 펄럭이며 들판을 헤매고 다녔을 뿐.

  "동네서 젤 작은집" 에 사는 "분이네"는 아마도 그 동네에 뿌리박고 가장 오래 살아온 전통적 농사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선조 대에 심은 살구나무가 "젤 큰 나무"가 되도록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가난을 못 면하고 찌그러진 "젤 작은 집"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다.   "밤사이"에 "대궐보다 덩그렇"게 펴오른 제일 큰 살구나무를 마당에 품은 "분이네"는 정녕 행복했을까? 그 후 분이네 소식이 궁금하다.

  제일 작은 "분이네 오막살이"와 제일 큰 "분이네 살구나무"를 병치시키면서 그 차이를 비교하는 비유기법이 돋보인다. 더군다나 밤사이에 "대궐보다 덩그렇"게 핀 살구꽃은 분이네 오막살이를 더욱 초라하게 부각시키는데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 시인은 "분이네 살구나무" 가 있는 풍경이 아니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3. <안경 6> 정완영 作

세월도 흩어 놓면
갈대밭이 되어 울고

머리맡 벗어 논 안경이
그 갈밭에 앉아 운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북천 가며 혼자 운다.

▶ 어느덧 돋보기 없이는 신문조차 읽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란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 거라고 허풍을 떨어봐도 억지라는 걸 나는 안다. 어쩌면 시인도 나처럼 느꼈을까? "세월도/ 흩어 놓면// 갈대밭이 /되어 울고//" 했으니 말이다. 살아온 세월을 숫자로 풀어서 세우면 "갈대밭"이 되고도 남지 않겠나. 여기에서 "갈대"는 셀 수 없는 숱한 세월을 상징함과 동시에 세어진 흰 머리칼을 의미하는 중의적 은유로 풀 수도 있겠다.

 

  이는 중장에서 "머리맡/ 벗어 논 안경이// 그 갈밭에/ 앉아 운다//" 로 미루어보면 허옇게 세어진 머리맡에 벗어놓은 초라한 돋보기 안경이 눈에 선하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그 안경조차도 소용없다. 홀로 달을 바라보며 어느덧 죽음의 길로 성큼 가까워진 자신을 발견하고 "북천 가며 혼자" 울고 있다. 이렇듯 죽음은 혼자 가는 길이다.

 

  종장의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같은 구절은 식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허나 사소한 일용품인 안경을 매개로 하여 "북천"까지 연결시킨 깊이 있는 사색은 탁월하다. 또한 짧은 문장 안에서도 독자의 심금을 뭉클하게 울릴 수 있다는 것이 시조의 매력이라면 이 작품은 가히 성공적이라는 느낌이다.


4. <꽃이 핀 자리> (동시조) 김명섭 作

별들이 놀다간 봄
자리마다 개나리꽃

해님이 쉬었다 간
자리마다 해바라기 꽃

찔레꽃 피어난 자리엔
누가 섰다 갔을까.

▶ 좀 가벼운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 시조라 하면 어딘가 중후하고 깊은 사색적인 철학을 떠올리게 해서 우선 거리를 갖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경박한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큼한 봄바람 같이 슬쩍 뺨을 스치기만 해도 기분 좋은 그런 시조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이 시조를 보면서 -아하, 그러면 그렇지, 그냥 스치기만 해도 향기로운 그런 작품이 있었구나-  안심했다.

  별같이 생긴 꽃 "개나리꽃" 은 "별들이 놀다간 봄"에 그들이 놀았던 "자리마다" 피어난다. 그야말로 "하늘에는 별, 땅에는 개나리꽃"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중장 역시 마찬가지로 해님같이 생긴 "해바라기 꽃"은 " 해님이/ 쉬었다 간// 자리마다/" 피어난다. 시각적 감각을 그대로 비슷한 사물에 비유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그러나 시인은 종장에서 묻는다, 가시 달린 "찔레꽃" 밭에는 "누가 섰다/ 갔을까//" 동요처럼 리듬감 있게 쉬이 익힐 수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 식물에 대한 관찰을 유도하는 교육적 효과도 겸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모든 꽃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경고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이고.

5. <벼룩> 이기라 作

어디로 뛸지 몰라
네 정체는 불안하다

내의 깊이 잠입해 와
치부까지 노리는가

한 번도 공습경보는
울려진 적 없어라.

▶ 앗, 이럴수가! 이 작품을 만난 순간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정말 시인의 눈은 "어디로 뛸지 몰라"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가 시조를 고리타분하다 했는가? 이 정도 되면 그 해학과 풍자가 여타 문학작품을 능가하지 않겠는가.

  인간으로 보면 그 "치부까지 노리는" 분명한 침입자인 "벼룩"이지만 어느 틈에 "잠입"한 줄을 몰라 "공습 경보"를 "울려"본 적이 없는 것이다. 종장의 마지막 마디에서 "울려진 적/ 없어라//"의 어미가 "......없었다"로 했으면 초장의 "....불안하다"와 더 자연스럽게 조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주변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벼룩"만 이렇듯 감쪽같이 공격하는가? 지금 우리도 모르게 "잠입"한 수많은 적들을 우리는 "공습경보"를 울리며 퇴치하고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거주하는 집이 주거의 개념을 넘어 富의 척도로 변질되었고 자동차는 운송의 기능을 넘어서 그 크기나 종류로 신분을 대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 또한 서로를 배려하는데 인색치 않던 우리네 미풍양속이 어느새 남을 헐뜯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어떤 "벼룩"이 "잠입해 와" 우리의 "치부까지 노리는가" 이제는 더 이상 허술하게 방치하지 말고 "공습경보"를 거국적으로 울려야하지 않겠는가 !
  외형적인 골계미나 소재의 기발함을 제쳐두고 행간에 숨어있는 패러독스를 읽을 수 있다면 만만한 내용이 아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6. <겨울 강> 황유경 作

연어의 온 몸에는 얼음이 박혔다
얼음 강 부수는 연어의 몸에서
봄 달을 닮은 알들이 무수히 태어나고.

죽은 어미 눈빛 닮은 달빛을 받고서
봄 달들이 겨울 강처럼 깨어나고 있었다
그날밤 한 마리 연어 겨울 강이 되었다.

▶ 일반적으로 연어라고 하면 백연어를 가리키지만, 홍연어·은연어·곱사송어 등 그 밖의 연어류를 "연어"라고 총칭한다. 해양에서의 빛깔은 등은 암청색, 몸 양옆은 은백색이다. 꼬리지느러미에는 은백색의 방사선이 지나고 있다. 그러나 산란기에 하천으로 거슬러 올라오면 은백색이 없어지고 몸 전체가 거무스름해지며 검정·노랑·분홍·보라가 섞인 불규칙한 줄무늬가 몸 옆에 나타난다.(Daum 백과)

 

 

  이런 시각적 현상을 "온몸"에 "얼음이 박혔다"고 시인은 은유하고 있다. 이렇듯 처절한 母川回歸 본능으로 돌아온 강에서 어미연어는 "봄 달을 닮은" 투명한 알들을 한배에 약 3000개씩이나 품고 강의 중류쯤에 초가을부터 초겨울에 걸쳐 산란하고 기진해서 생을 마친다.(Daum 백과)  "죽은 어미 눈빛 닮은 달빛을 받고서" "겨울 강처럼" 깨어난 알들은 그들의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또다시 바다로 회유한다. "그날 밤 한 마리 연어"는 돌아올 그들을 기다리는 "겨울 강이 되"어서 침묵한다. 이렇듯 겨울 강은 생명의 생성과 소멸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겨울강>에서 희생적 모성본능의 연어를 떠올리고 이를 아름다운 생명의 서사로 엮어낸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굳이 흠을 잡자면 제 1수 초장에 이어 중장에서 또 다시 "연어의 몸"을 반복한 것이다.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로 얼음 강을 부수고 역행하는 연어-그 자체가 벌써 "연어의 몸"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던가. 강조법이 아니라면 시조에서는 가능한 한 말을 아껴야하는 게 미덕이다.

  이외에도 "봄 달"(첫 수 종장과 둘째 수 중장)의 반복이나 "달빛"등 이음동의어들이 어휘력의 한계를 드러낸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뿐만 아니라 첫 수 중장의 형식은 3 3 3 3으로  이루어져 약간 음보가 모자라는 듯 하다. 좀 더 고민했다면 충분히 자연스런 음수율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반면에 내용면에서 시조문학답게 결 고운 서사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7. <잡초 예찬론> 김보영 作

삼동을
버텨온 게
빙산처럼 깊이 있어

호미 끝
잡는 힘은
땅 한 평을 물고 있다

잔뿌리
남기는 피의 절규
또 하나의 삶을 본다.

송두리째
뽑아내어
햇살에 펼쳐봐도

지표에
칼을 꽂고
밤이슬 기다리는

다부진
눈빛 속에서
채근담을 읽게 한다.

▶ 사람은 때때로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인간의 존재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여기 "삼동을 버텨온" 보잘것없지만 거대한 "빙산"같이 뿌리깊은 잡초의 삶이 있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호미 끝"에 온몸으로 맞서 끝내 "땅 한 평을 물고" 늘어지는 포기할 수 없는 생의 질긴 집념, 그러나 안타깝게도 물리적인 힘에 밀려 온몸이 뽑혀나가면서도 "잔뿌리" 하나라도 "남기는 피의 절규"로 저항하고 있다. 이 얼마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인가 !

 

  마침내 "송두리째 뽑아내어" 뜨거운 열기의 "햇살에 펼쳐" 온몸이 오그라드는 고문을 당해도 오직 한으로 멍울 진 가슴에 비수를 품은 채 "지표에 칼을 꽂고 밤이슬을 기다리는" 살아있는 "눈 빛 속에서" 인간의 道와 哲理, 그리고 우주의 이치를 禪詩처럼 일깨워 매일같이 풀뿌리로 씹히는 "채근담"으로 인간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고자하는 강인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찮게 흘려보는 잡초의 생명력에 초점을 맞춘 작가의 시선이 건강하다. 시인은 그 추운 겨울을 땅속에서 견디어낸 잡초의 모습을 "빙산"에다 비유하며 그 생명력의 깊고 큰 영역의 느낌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과장법을 사용해 보여주고 있다. "호미 끝" 에서도 "땅 한 평을 물고"늘어지는 잡초의 강인한 생명력이 제 1수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제 2수 종장에서 "채근담"이 등장하는 것은 의외였다. 더군다나 "읽게 한다"고 사역동사를 썼다, 그렇다면 잡초가 화자에게 채근담을 읽게끔 유도한다는 뜻인지, 아니라면 잡초자체가 화자에게 채근담의 풀뿌리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스스로 희망한다는 의미인지, 또는 잡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화자가 그로 인해 채근담을 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인지.... 애매한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적확한 어휘의 동사를 선택했으면 소통이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반면에 송두리째 뽑힌 잡초가 뜨거운 햇살에 말려지는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제2수의 중장에서 "지표에/ 칼을 꽂고// 밤이슬/ 기다리는//"이라고 한 섬뜩한 은유는 빼어나다. 이렇듯 잡초의 뿌리가 지면으로만 향하는 것을 "칼을 꽂"는다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러한 환유적 사유가 시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독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이다.

■ 이상으로 모자라는 식견에 닿는 대로 몇 편의 현대시조에 대한 나의 느낌과 해설을 시도해 보았다. 어떤 부분은 내 우매한 안목이 터무니없는 것 같기도 해서 두려웠고 어떤 부분은 시와 나의 감정이 만나지 못하기도 했다.

  허지만 한줄 한줄 시를 분석하고 음미하는 동안에 뭔가 희미하기는 해도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감을 잡았다, 이런 느낌이 시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욕심도 있다. 앞으로 더욱 독서의 폭을 넓혀야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쓰신 시인들에게 本稿에서 서툴게 작품을 다룬 나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아량을 바랄 뿐이다.  

                                                                                                                ▷ 2011년 5월 - 박해성의 제멋대로 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