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짝사랑 - 이윤학
heystar
2017. 8. 7. 10:54
짝사랑
이윤학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몸을 토막 내고
꼬리를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출전] - 이윤학 시집 『꽃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에서 발췌.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핟상, 불교문예작품상, 2017 지훈상 문학부문 등을 수상.
시집; 『먼지의 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나를 울렸다』 등. 그외 산문집, 장편동화 등을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