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체공녀' 강주룡 - 박준성

heystar 2017. 5. 17. 18:06


이 글은 <더불어 사는 희망연대 노동조합> http://cafe.daum.net/hopeunion/9Fgb/284 에서 퍼온 글입니다.



          강주룡 : 고공농성을 벌인 여성노동자                                                    작성자 박 준성
                                                    
‘체공녀’ 강주룡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한 여성이 고공 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우리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주인공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의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신문에서는 강주룡을 ‘체공녀’라고 하면서 을밀대 농성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이라고 평가하였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당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죽을 때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 을밀대가 붙어 다녔다.

   그러나 우리가 강주룡에 대해 관심을 갖는 까닭은 을밀대 고공농성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31년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잠시 무장독립단체에도 참여했으며,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선진노동자로, 노동조합 파업투쟁의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로 성장하였다. 강주룡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을 벗어나 당당한 여성이자 노동자로 깨어났으며,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서는 당당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계 대공황의 파도에 휩쓸린 ‘고무공장 큰 아기’들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의 주식 값이 폭락하였다. 은행이 문을 닫고 많은 기업이 쓰러졌다. 대규모 경제 공황이 세계를 휩쓸었다. 한쪽에는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 가는데도 소비는 얼어붙고 공장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미국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 뉴딜정책을 펴면서 산업을 재건하고 실업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와 식민지 모국을 블록 경제로 묶는 방안을 채택하였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세력은 외국을 침략하여 위기를 벗어나려 하였다.

  일본도 경제 공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호황을 누렸던 일본 경제는 전쟁이 끝나자 판매시장을 잃어버리고,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대공황의 파고가 일본에도 밀어닥쳤다. 상품 수출이 크게 줄고 공장이 줄지어 문을 닫았다.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농업공황도 심각했다. 실업자들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몰려들었다. 누에고치와 쌀값이 크게 떨어지는 가운데 지주들의 농민 수탈이 더욱 심해졌다.  

   공황 때문에 위기에 몰린 일본 독점자본은 남아도는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군부는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틀어쥐고 대륙을 침략하려고 하였다.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여 만주와 중국을 새로운 자본 투자와 상품시장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1931년 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관동군)은 일부러 남만주 철도를 파괴하고 이를 중국군이 도발했다고 우기면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여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우고 뒤에서 조종하였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조선을 만주와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공업 기지이자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반도는 급속히 공업화되었다. 1930년대 전반 일본 제국주의는 자본의 과잉 투자와 과열 경쟁을 막으려고 ‘중요산업통제법’과 ‘공장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규제를 벗어나 조선에 진출한 일본 독점자본은 자유롭게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윤을 높일 수 있었다. 일본 독점자본과 경쟁하여 살아남으려고 조선인 자본도 노동자들을 심하게 착취하였다. 식민지의 대부분 노동자들은 턱없이 낮은 임금, 장시간의 과도한 노동, 형편없이 나쁜 노동조건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제국주의 자본과 식민지 권력은 노동통제정책을 강화하여 노동자와 노동단체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은 먹고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식민지 시대 여성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2분의 1,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이렇게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 그 뿐 아니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인신구속, 폭행,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일터 가운데서도 일하기가 더 힘들고 임금도 쌌던 곳이 고무신발공장이었다. 고무신발공장에는 젊고 팔팔한 노동자들이 취업하기를 꺼려해서 그 당시에는 ‘늙은 노동자’로 분류되는 30세 전후의 기혼여성들이 주로 많았다. 집에 돌봐줄 사람도 없고 맡길 곳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아이들을 공장으로 데려왔다. 고무 냄새와 열기가 푹푹 찌는 작업장에서 아기에게 젖을 빨리며 일을 했다. 불량품이 생겼을 때는 노동자들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일을 감시하고 불량품을 판정하는 남자감독관의 횡포와 성희롱도 끊이질 않았다.

  '고무공장 큰 아기'라는 신민요는 바로 이러한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잘 드러내 주는 노래이다.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 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나"

    세계공황이라는 파도는 식민지 조선에까지 밀려왔다. 소비재 산업인 고무신발공장들도 손해가 컸다. 자본가들은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보통 때도 흔히 쓰던 수법을 모두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자르고, 임금을 깎고, 노동시간을 늘이고, 노동강도를 높였다.

    1930년 5월 고무공업 자본가들의 모임인 '전조선고무동업연합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평균 10% 깎겠다고 발표했다. 8월 1일 '평양고무동업회'에선 한술 더 떠 임금을 17% 깎겠다고 평양고무직공조합에 알렸다.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인하 반대, 해고반대' 등 20여개 조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8월 7일 아침부터 5개 공장 1천 8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6개 공장에서는 태업을 벌였다. 8월 11일에는 고급기술 노동자를 포함한 기계공 3백여 명도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노동자는 2천여 명을 넘어섰다. 평양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9월 초까지 이어졌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노동자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 방 을 따로 만들어 여성노동자들끼리 움직이는 파업본부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8월 10일 노동자대회에서는 임금인하 반대와 해고 반대 뿐 아니라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같은 모성보호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파업에 참가했다.

    강주룡도 고무신발공장 노동자로서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겪었으며,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에 참여하여 경험을 쌓았다.


강주룡의 짧은 생애 치열한 삶 - 평원고무공장 노동자가 되어

  1931년 5월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전까지 강주룡이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그해 6월 7일 <<동광>> 잡지 기자 ‘무호정인’과 했던 인터뷰 내용을 통하여 가까스로 이전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이다.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갔을 때 신문에 실린 나이는 30이었다. 우리 나이로 31살이었다고 미뤄 보면 그가 태어난 해는 1901년으로 짐작된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서간도로 이사했다. 20살 때 통화현에 사는 최전빈과 결혼했다. 남편은 나이가 5살이나 아래였다. 21살 때 16살 된 남편과 같이 백광운(白狂雲)의 독립군부대에 들어가 6, 7개월 활동하였다. ‘거치장 거려 귀찮으니 집에가 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시댁으로 돌아왔다. 5, 6개월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았다. 곧바로 달려갔으나 남편은 그날 밤 숨졌다. 시집에서는 ‘남편 죽인년’이라고 의심하여 중국 경찰에 고발하였다. 강주룡은 경찰서에서 일주일 동안 단식하면서 무고함을 주장하였다.

   1924년 서간도에서 돌아와 사리원에서 일 년쯤 살았다. 1926년 평양으로 옮겨 고무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친정 부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고, 집안을 꾸려나가는 일은 그가 해야 할 몫이었다. 노동조합에 들어가 1930년 평양 고무공장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적극 참가했다.

   강주룡의 활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5월에 일어난 평양 평원고무공장노동자 파업투쟁 때부터였다.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은 회사들의 연합체인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제일 먼저 임금을 깎겠다고 나섰다. 5월 16일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겠다고 알렸다.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고무공업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300여 명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5월 28일, 싸움을 시작한지 12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 노동자들은 싸움의 강도를 높이려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하고, 한 밤중에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을밀대에서 벌인 고공농성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광목을 한 필 사가지고 한밤중에 을밀대를 찾아 올라갔다. 처음에는 죽음으로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고 30여 년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죽기로 작정했는지라 더 이상 살겠다는 미련은 없었으나, ‘이대로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리고 죽어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캄캄한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눈에 들어왔다. ‘옳다, 죽더라도 저 위에 올라가 우리가 싸우는 뜻과 평원공장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사다리도 없는데, 지붕 위로 어떻게 올라갈까 이리저리 궁리를 하였다.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한 귀퉁이 너머로 던져 넘겼다. 광목 한쪽을 기둥에 묶고 힘주어 당겨보았다. 뒤편으로 늘어진 광목에 매달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5월 말, 봄이라지만 아직도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싸늘했다. 누가 광목을 타고 쫓아 올라올지도 몰랐다. 늘어진 광목을 걷어 올려 몸을 감쌌다. 계속 싸움을 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몸에 졸음이 몰려왔다. 죽을 작정을 하고 을밀대에 올라왔는데도 쏟아지는 잠을 어쩔 수 없어 깜박 잠이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었다. 새벽 5시 조금 넘은 시간, 먼동이 트고 있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을밀대  앞마당에 몰려와 지붕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웬 여자가 무슨 사연으로 저 위에 올라가 앉아 있을까 궁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강주룡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각오를 밝히고 외쳤다. 연설을 듣던 한 예수교 장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강주룡이 을밀대 위에서 외쳤던 내용이 신문에도 간단히 실렸다.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깍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중략)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뿐입니다.”(?동광? 1931년 7월호, ‘중략’부분은 원자료에도 중략한 것)
  
임금인하를 막아내다

   강주룡은 을밀대 꼭대기에서 온 몸으로 자본의 착취와 식민지 권력의 폭력을 폭로하였다.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파업투쟁이 평양 2천 3백명 고무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가장 앞장서서 지키는 싸움이라는 것, 근로대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명예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밝혔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왔다. 뒤쪽에서 소방대원이 사다리를 놓고 몰래 올라가 완강히 버티는 강주룡을 아래로 밀어 떨어트렸다.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기절하였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쟁의가 해결되기 전에는 굶어 죽더라도 먹지 않겠다며 밥 한술 뜨지 않고 완강히 버텼다. 검속시간이 끝나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을 때 다른 공장 노동자들은 동정 태업을 벌였고, 평양노동연맹을 비롯한 노동, 사회단체에서는 적극 지원하겠다고 결의하고 응원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직공을 새로 모집하여 공장을 돌리려고 하였다. 강주룡이 풀려나자 힘을 얻은 노동자들은 공장 담을 넘어 공장점거투쟁을 벌였다. 이때 안병식(23), 오양도(27), 고도실(18), 최용덕(28)이 다시 잡혀 들어갔다. 이들도 58시간 단식 투쟁으로 버티다 6월 3일 저녁에 풀려났다.

   새로 들어온 직공들을 막으려고 싸우던 강주룡과 간부들이 기절하여 쓰러졌다. 며칠 동안 단식을 해서 몸이 쇠약해진데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전차와 자동차를 가로막고 오랜 시간 진흙탕 속에서 뒹굴었기 때문이다.

   6월 6일, 파업단 대표로 공장 측과 만난 강주룡은 “임금 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하였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 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가 아닌가”하고 따졌다. 회사측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가족의 생사가 달려있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6월 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회사측이 임금을 깎겠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전원을 채용 하라는 요구는 이뤄내지 못하였다. 대신 파업공 27명과 신모집공 20명을 나누어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쟁의가 매듭지어졌다.  

 요약

* 강주룡은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며 14살때 아버지의 실패로 서간도로 옮겨갔다. 20살에 최전빈과 결혼했으며 이듬해에 남편과 함께 독립군부대에 편입하여 활동하다가 남편이 죽자 귀국하였다. 1926년 평양 고무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에 앞장섰다.

* 세계대공황은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 독점자본은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깍고, 노동시간을 늘이고 노동강도를 높였다. 1930년 고무공업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평균 10%정도로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 인하 반대, 해고 반대’ 등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다.

* 강주룡도 1930년에 있었던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투쟁에 참가하였다. 강주룡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때부터이다. 파업투쟁에 앞장섰던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다. 이후 강주룡은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임금인하를 막아냈다.

* 1930년에 들어서면서 합법적으로 노동운동을 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식민지 지배 권력의 탄압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치지 않았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강주룡도 1930년대 만들어진 혁명적 노동합의 하나인 ‘평양 적색노동조합’ 활동에 참가했다. 이 활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에 감지되었고 강주룡도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다 1932년 병보석으로 풀러났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풀려난 지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 강주룡은 봉건사회의 틀을 벗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한 노동자로서 우뚝 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여성노동자였다. 강주룡은 노동자 출신으로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선진노동자로 파업투쟁의 지도자로, 그리고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로 성정한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다.


박준성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서 펴년 <<인물로 본 문화>>(2005)에 실은 글 입니다. 방송대 위성 TV에 인물로 본 문화 시리즈 강의가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직접 못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