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강영은의 시 <바람의 금지 구역>에서 바람 피우다 - 박해성

heystar 2011. 4. 8. 17:06

 

       바람의 금지 구역

 

                                                        강 영 은

 

 

바람의 행보는 벼랑을 넘으면서 시작된다 관계의 사이에 서식하는,

사랑합니다, 사랑합시다, 라는 종결형 어미에 대하여 대답하는

 

행간에 머리를 들이민 바람의 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장은 마른

풀 쓸리는 벌판, 수백만 마리의 새떼가 날아가는 장면은 그 다음에

목격된다

 

          고도 높은 울음이 통과할 때마다 피기를 반복하는 북북서의 허공을

          바람은 꽃으로 이해한다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펴는 바람의 편집증에

          대하여 여러 번 죽어 본 새들은 안다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 할 겹겹 벼랑이라는 것을,

 

          서녘하늘에 붉은 꽃반죽이 번진다 허공에서 배어나온 꽃물이라고,

          당신은 바람의 은유를 고집한다 내가 잠시 벼랑 너머를 바라본 건

          그때였을 것이다

 

          금지된 허공을 넘은 새들의 무덤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바람은 벼랑을

          끝내 읽지 못한다

                 

              -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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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흔한 시적 소재인 바람(wind)이야기로 흘려 읽었다. 가장 흔하고 상식적인 문학적 소재를 접한다는 고정관념이 나를 눈멀게 했는지 술렁술렁 글자 그대로 쉬이 읽히는 시라고 생각했다. 즉 바람이 벼랑 앞에서 멈칫거리다 새처럼 솟구치며 장애물을 넘는다거나 바람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노을이나 꽃들 심지어는 인간까지 모든 존재가 생의 ‘벼랑을 끝내 읽지 못’하는 우매함에 대한 시인의 섬세한 의식의 흐름을 나열했다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하지만 큰 감흥은 없었으므로 내심 <올해의 좋은 시>도 별것 아니네, 훑고 넘어갔다.

 

  그러나 시창작전공 토론시간에 나의 오만한 시 읽기는 무참히 백기를 들고 말았다. 지도교수의 시 해설을 경청하면서 내가 얼마나 시 앞에서 경건하지 못했는가를 깊이 반성했다. 시란 인간의 가장 솔직한 내면의 아우성임을, 한 영혼의 경건한 고백록임을, 그토록 가볍게 다루었는가, 나의 부끄러운 치기를 반성하며 성심을 다해 오늘 다시 이 시 앞에 섰다.

 

  우선 첫 연은 교수님의 의견에 동조하며 행을 도치시켜 읽어내기로 한다. ‘사랑합니다’하는 고백에 이어 ‘사랑 합시다’ 하는 청유형 문장까지 누군가 상대에게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거기에 상대가 대답함으로써 1행의 ‘바람의 행보는 벼랑을 넘으면서 시작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바람’이란 ‘wind’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벼랑’이 사라지면서 둘은 사랑의 열병에 휩싸인 것이다. 속된 말로 ‘바람’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둘째 연- ‘마른 풀 쓸리는 벌판’에 들어선 화자는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뛴다. ‘수백만 마리의 새떼가 날아가’듯 홰치는 소리로 뛰는 심장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 이 선명한 메타포, 독자는 이쯤에서 시인에게 갈채해야 마땅하다.

 

  셋째 연으로 들어서면 나는 더욱 부끄러워야한다. 왜냐하면 ‘북북서의 허공’이라는 어휘를 찬바람이 불어오는 시베리아 계절풍쯤으로 이해하고 지나쳤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설명으로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라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9년도 영화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주인공이 벼랑에 매달린 연인의 손을 차마 놓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이다. ‘허공을 꽃으로 이해’하는 바람은 죽음 앞에서도 ‘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펴는’ 적나라한 사랑의 성애장면 묘사와 함께 드러나는 사랑의 감정이란 ‘여러 번 죽어본 새들은 안다’ 즉 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도저한 결론에 도달한다.

 

  하여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할 겹겹 벼랑이라는 것을,’ - 날개는 한 쌍이므로 두 사람을 의미한다고 나는 해석 한다 - 세상=허공은 두 사람이 함께 극복해야할 ‘겹겹 벼랑’ 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일상이 그러하지 않은가.

 

  다섯째 연에서는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다. ‘서녘 하늘에 붉은 꽃반죽이 번진다’라는 구절은 인생의 황혼기를 의미한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아직도 ‘바람의 은유를 고집’하는 ‘당신’에 비해 화자는 벼랑 너머를 보는 여유를 가진다. 성숙한 사랑의 배려일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이들 사랑의 내막이 슬쩍 드러난다. ‘금지 된 허공을 넘은’ 그러니까 두 사람은 금지 된 사랑에 탐닉한 것일까?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적 교류이므로 무덤이 보이는 마지막까지 짐짓 모르는 척 ‘벼랑을 끝내 읽지 못’하는 것이 바로 바람=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위의 시를 풀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안에 단단하게 뭉쳐있는 고정관념을 어떻게 몰아낼 것인가가 가장 큰 난제로 부각된다. 질서를 깨는 질서가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고전적인, 그래서 진부한 시읽기의 한계를 벗어나야 살아남을 것 같다, 아직은 멀다.  

 

    -   2011년 4월 박해성의 제멋대로 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