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의 시 <고양이 감정의 쓸모>의 쓸모 - 박해성
고양이 감정의 쓸모
이 병 률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보아야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예요
한번 스친 손끝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
햇빛의 경계를 허물더라도
나는 제자리에서만 당신 위를 가로 질러 날아가는 하나의 무의미예요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고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 새는 며칠째 무의미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 가지를 날라 놓고 가지는 보란 듯 쌓여 무의미의 마을을 이루어요 내 바깥의 주인이 돼버린 당신이 다음 생에도 다시 새(鳥)로 태어난다는 언질을 받았거든요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의미를 밀봉한 주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2.
한 서점 직원이 시인을 사랑했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지겠다
싶었다
바닷가 마을 그의 집을 찾아가 잠긴 문을 꿈처럼 가만히 두드리기도 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를 문장으로 문장으로 스치다가도 눈물이 나 그가 아니면
안되겠다 하였다
사랑하였다
무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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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의 시 <고양이 감정의 쓸모>는 고백적이고 해석적인 진술시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시적 묘사가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1인칭 화자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내면의 고백적 독백은 시적주체의 청각적 진술 특성이 두드러진다. 좀 더 면밀한 분석적 차원에서 규정하자면 1과 2로 나누어진 의미 단락에 주목해야한다.
제 1단락에서는 고양이를 시적주체와 동일시하는 동일화 기법이 자연스럽게 차용된다. 즉 “천천히 늙어가”기 위하여 “발걸음을 늦추”지만 세월은 그리 만만치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이 피고 져도 그냥 속수무책 “지켜보아야 하는” 사소한 존재의 무력감이 드러난다. 이는 인간사도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은가, 하여 살면서 이생에서 아쉬웠던 모든 것들을 “다음번엔 태어나” 이루고 싶은 내면의 독백을 1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빌어 진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묘사적 관점에서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살금살금 소리 없이 나뭇가지가 늘어진 담장 위를 걸어 다니는 늙은 고양이를 그려볼 수도 있겠다.
제 1단락의 둘째 연은 묘사와 진술이 교직된다. 필자는 이 문단의 행을 도치법으로 읽어내기로 했다. “햇빛의 경계를 허물”고 허공을 날아가는 “당신은 가지를 입에 물고 나는 새”다, 어쩌다 얼결에 한번 “손끝”=‘마음’이 스쳤을 뿐이지만 “나는 제자리에서만” (지상에서) 닿을 수 없는 당신을 그리워하는, 그러나 당신은 나의 존재조차 모르는 “하나의 무의미”로 의미 밖에서 사랑을 앓는 고양이의 감정, 또는 당신의 짝사랑 고백이 절절하다.
특히 “나는 새를 보며 놓치지 않으려 몸 달아하고 새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토록 마음이 쓰여요”하는 제 1단락 셋째 연 도입부의 직설적 고백에 이르면 일인칭 화자가 얼마나 상대에 열중해 있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여 “보란 듯”나뭇가지를 쌓아 여전히 나의 존재를, 나의 사랑을 캄캄하게 모르는,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의미의 마을을” 축조한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는 “내 바깥의 주인이 돼버린 당신”에게 다음 생을 기대하며 의미심장한 언질을 남긴다. “의미는 가까이 말아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랑도 하지 말라는 부탁일까? 그렇다면 이기적이다. 아니라면 사랑은 무의미하니 그럭저럭 살라는 뜻일까...? 필자는 이쯤에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해하다. 더군다나 “밀봉한 주머니를 물어다 종소리를 만들어요 내가 듣지 못하게 아무 소리도 없는 종소리를” 로 한 문단을 매듭짓는 시인의 속내는 내 깜냥으로는 짚어낼 길이 없다. 다만 “밀봉한 주머니”를 캄캄한 의미 주머니 즉, 절망적 무의미한 사랑을 의미하는 객관적 상관물 정도로 겨우 짚어냈으며 응답 받지 못한 ‘당신’의 목소리는 화자에게 들리지 않는 ‘종소리’로 짐작할 뿐이다.
詩가 쉽게 읽혀야만 좋은 시는 아니다, 하지만 애매모호함으로 독자를 우롱?하는 요즘 자유시는 많은 이를 당혹케 한다. 그들의 보폭을 따라가지 못하는 필자의 어눌함을 탓해야 하는 건지 이쯤에서 시 읽기를 포기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다.
이 시에서는 제 1단락, 첫 연의 마지막 문장 즉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라는 구절은 갈등 없이 좀 평온하게 살아가자는 의미로 쉽게 읽히지만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예요” - 여기에서 ‘모든 것’이란 무엇이며 또 느닷없이 ‘넓히지 못’ 하다니 무슨 말인가? ‘넓힌다/넓히지 못한다’는 말은 면적이나 영토나 마음이나 등등 활동범위가 평면적으로 확대된다는/혹은 제한된다는 뜻일 텐데 과연 적확한 어휘가 제자리에 적절하게 배치된 문장일까? 작가가 특별해지기 위해서 난해한 어법을 사용했다면 너무 작위적인 건 아닐까? 사실 이 문장은 아직도 필자가 풀어내야 할 난제로 남겨두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왕 내친김에 제 2단락으로 넘어서자 3인칭 화자의 구체적 정황 묘사가 펼쳐진다. 시인을 짝사랑하는 서점 직원 - 한 번도 본적 없는 시인의 시를 읽다가 감동하여 “그가 아니면 안 되겠다” 하여 결국은 짝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그에게 밥을 지어 곯은 배를 채워주고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살아지겠다 싶”은 사랑(혹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그러나 정작 사랑받는 그 시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꿈같은 사랑, 눈 뜨면 흔적도 남지 않는 사랑, 그런 무의미한 사랑 이야기를 빈집의 잠긴 문 밖에 털썩 주저앉아서 누군가 들어도 좋고 못 알아들어도 좋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화자, 혹 당신은 아니신지.....?
이병률은 이 작품에서 귀찮고 까다로운 문법적 부호를 모두 생략했다. 일반적 상식을 넘어 오직 시적 언어로만 소통하겠다는 의미이리라, 그래도 단락과 행갈이를 적절히 이행함으로써 독해에 큰 혼란의 여지는 없었다.
결국 제 1단락의 새를 사랑하는 ‘고양이 감정’에 기대어 제 2단락의 소통 불가능한, 그래서 무의미한 점원(=인간)의 감정(=외사랑)을 털어놓은 것이다, 라고 한다면 어처구니없이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모든 존재의 내면이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가 그 영혼의 촘촘한 세포를 읽어내려면 이정도의 우회는 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여 <고양이 감정의 쓸모>라는 낯선 제목으로 시인은 우선 독자의 뇌리를 자극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고양이 감정’조차도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는데 ‘쓸모’가 있다니 참신한 발상법 아닌가! 연암 박지원이 <호질전>에서 주창하던 ‘氣一元論’이나 소쉬르식 구조주의의 중심을 무너뜨린 쟈크 데리다의 ‘해체론’같은 문학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면 너무 진부한 해석일까?
- 2011년 3월 박해성의 제멋대로 시읽기